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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영국 여인의 일기 두 번째, 런던에 가다 ㅣ 어느 영국 여인의 일기
E. M. 델라필드 지음, 박아람 옮김 / 이터널북스 / 2023년 2월
평점 :

삶이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중략)
동네 사람들 사이에 내가 자기 얘기를 책에 쓰는 게 아닐까 의심하는 듯한 기이하고 불편한 기류가 흐른다.
이젠 꿈꾸던 작가가 된 주인공은 남편의 무심한 관심과 동네 사람들의 견제, 은근히 자신의 글을 까는 편지들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낸다.
딸아이는 학교에 보내달라 하고 그로 인해 직업을 잃게 생긴 마드모아젤은 식음을 전폐하고, 인쇄를 받아들고 뭘 할까 고민하다 각종 청구서와 세금을 낸다. 로버트가 은근하게 당신을 위해 진주 목걸이라도 사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묻지만 그녀가 원하는 건 런던에 거처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동상이몽?
제목처럼 런던에 입성한 주인공의 런던 일기는 웬만한 장르소설 못지않다.
서로에 대한 시기와 배려인 척 돌려까기가 일상처럼 흐르고, 문학적 소양을 가진 자들이라 해도 남에 대한 험담과 자기주장들은 빠지지 않는다.
어딜 가나 주인공은 촌스럽게 느껴지고, 사람들의 겉모습이 속과 같지 않음을 여실히 깨닫는다.

문득 기이하고 쓸데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만약 내가 소설의 여주인공이었다면 최근에 일어난 빌과의 재회가 긴장 넘치는 서정적 이야기로 발전했을 테고 결국 체념하거나(현대 소설이라면) 관습에 도전장을 내미는 쪽으로 결말이 났을 거라고 말이다.
늘 그렇듯 현실은 소설과 너무도 동떨어져 있기에 나는 잔뜩 쌓여 있는 집안일을 처리하기 위해 서둘러 안으로 들어간다.
주인공처럼 현실의 경계를 잘 지키는 사람이 또 있을까!
여러 가지 일들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그녀에게 애정이 솟구친다.
한편으로 답답한 면도 있지만 그건 항상 제자리로 돌아가는 모습 때문일 거다.
이것도 소설인데 일탈하면 안 될까? 하는 읽는 이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항상 현실에 사니까!
다양한 런던 친구들을 모습을 통해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원칙과 어떤(?) 철학이 그녀를 지탱하면서 그녀 주변의 모든 것을 지켜내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흐트러지지 않고, 남과 자신을 비교하지만 곧바로 자신으로 돌아오는 오뚝이 같은 근성.
누군가를 부러워하지만 곧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녀가 자신의 삶에 탄탄하게 뿌리를 내린 안정감으로 살고 있기에 그녀의 시선이 늘 읽는 이들에게 소소한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거 같다.
그녀의 말처럼 소설 속 여주인공의 현실감 없는 러브 스토리가 끼었다면 이 책은 외면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녀 주변인들의 덤덤한 마음도 가끔은 너무하다 싶은데 나름 또 매력적이다.
그건 그녀의 펜 끝에서 나오는 마력이 아닐까.
그녀가 그려내는 주변인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마치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다.
재치 있는 그녀의 표현들이 캐릭터들을 살아나게 하니까.
기고만장해져서 런던에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까 하는 건 기우였다.
그곳에서도 그녀는 자신을 잃지 않는다.
아주 잠시의 순간이라도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과 남편, 이웃들을 잊지 않는다.
화려한 사교계의 가십들 속에서 그녀가 그리워 한 건 매일이 똑같은 거 같은 지루해 보이는 자신의 집이었으니까.
그래서 그 당신 많은 여인들에게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모두가 꿈꾸는 일탈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일탈이니까...
그것을 가장 잘 보여준 이야기가 바로 <어느 영국 여인의 일기>시리즈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