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느 영국 여인의 일기 세 번째, 미국에 가다 ㅣ 어느 영국 여인의 일기
E. M. 델라필드 지음, 박아람 옮김 / 이터널북스 / 2025년 6월
평점 :

나는 계약서를 열네 번쯤 연이어 읽는다. 너무 놀라서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다(말이 그렇다는 거다). 내가 정말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
미국 출판사에 초청을 받은 주인공은 심정이 복잡하다.
이 사실을 남편 로버트에게 말하고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언제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이다.
그 와중에 런던에서 알게 된 트레시더 부인이 여행길에 아들과 함께 들려서 차 한잔 마시고 가겠다고 통보를 한다.
그럴 상황이 아닌데 거절할 수 없다!
이 트레시더 부인 정말 짜증 난다.
런던에 있는 주인공의 집을 세를 주라고 닦달한다. 자기가 아는 사람에게.
결국 그 얘길 하려고 집에 들른 것인데 모든 걸 자기 뜻대로 해버리는 이 여자에 대한 불만을 전혀 쏟아내지 못하고 일기에다 적어버린다.
일기엔 날카롭게 비판하는 글을 잘 쓰는데 실제 마주한 상황에서는 거의 한 마디도 제대로 던지지 못하는 이 여자.
남편에게 매번 전전긍긍하고
아이들에게도 싫은 소리를 못하며
하녀에게도 할 말 못 하고 혼자 이불 킥~ 하는 이 여자.
우여곡절 끝에 미국에 도착해서 환대를 받으며 미국인의 친절을 듬뿍~ 받는 이 여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도시를 다니지만 자신의 개성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해 속상한 이 여자.

옛 플랑드르의 풍경 속에서 옛 플랑드르 시청의 옛 플랑드르 시계가 종을 울린다. 아서와 내가 정말 아름다운 소리라고 입을 모으는 순간, 보이지 않는 확성기에서 째지는 듯한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드디어! 새로 나온 치약을 소개합니다! 뜬금없는 광고에 옛 플아드르 분위기는 산산이 깨지고 아서와 나는 질색하며 클럽으로 가서 그의 가족을 만나 훌륭한 점심을 먹는다.미국에 대한 온갖 소문을 듣고 직접 방문한 주인공에게 미국은 참 친절하다.
많은 파티에 초대를 받고, 생각 보다 많은 청중 앞에서 서고, 시카고 박람회까지 다녀온다.
파티의 연속, 다양한 사람들의 환대, 그 안에서 몸 둘 바를 모르는 이 여자.
영국에서 보다 미국에서 더 작가 대접을 받는 거 같은 이 여자.
그녀의 일기를 일고 있음 키득키득 웃음이 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짠하다.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 못하고, 일기를 통해 쓴소리를 하면서 자신을 반성하는 모습에서 내 모습이 보인다.
지금은 '거절'에 대해 확고함을 가지고 있지만 한때는 '거절'을 못해서 혼자 전전긍긍하던 시절이 있었다.
자다가도 이불 킥을 했던 기억이 오버랩 되면서 주인공의 심정을 이해해 본다.
미국에서 그녀가 실수를 하면 어쩌지?
미국에서 뭔 일이 있는 거 아닐까?라는 나의 오지랖은 쓸데없는 거였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 속 주인공은 미국에서 충분히 자신을 누렸다.
영국에 두고 온 아이들과 남편을 떠올리며 울적해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작가로 대접해주는 미국에서의 여행이 그녀 인생에 가장 행복한 기분을 만끽했을 거 같다.
100년 전 이 여인은 전혀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환경과 시대만 달랐을 뿐 지금 우리와 그리 다를 게 없다.
이 소소한 일기를 읽는 시간에 마음이 온기로 차올랐다.
평범해 보이는 데 평범하지 않은 그녀.
평범해 보이지 않는데 지극히 평범한 그녀.
그녀의 재치만점 일기가 그 당시 여성들의 속내를 대변해 줬기에 그토록 인기가 있었던 거 같다.
다들 그녀처럼 살았을 것이다.
사소함에 안달하고 큰일에 오히려 대범해지며 이웃들에게 상냥하기 위해 일기장을 불태웠던 여인.
미소를 짓게 만드는 이야기들이 읽는 이의 마음도 가볍게 해준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시대적 특권이라는 걸 그녀를 통해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