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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ㅣ 빛소굴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강두식 옮김 / 빛소굴 / 2025년 2월
평점 :

한길, 즉 마을의 큰길은 성이 있는 산으로 통하지 않았다. 단지 성이 있는 산에 가까이 접근하는 듯하면서, 사실인즉 짓궂게 구부러지곤 했다. 하여튼 성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도무지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나중에는 이 길이 틀림없이 성으로 구부러져 들어갈 것이라고 K는 끊임없이 기대했다. 이런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앞으로 걸어갈 수 있었다. 오히려 너무나 지쳤기 때문에 이 길을 단념해 버릴 수 없었다.
이 끝없이 계속되는 <성>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도대체 <성>은 뭘까?
눈에 멀찍이 보이지만 절대 다가갈 수 없는 곳.
성을 향해 걷지만 가도 가도 닿지 않는 곳.
그 성으로 가는 길은 왜 그리 어려운 걸까?
토지측량사 K
성으로 가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코 성에 가지 못하는 K.
<성>을 읽으며 카프카가 말한 <성>은 우리의 꿈, 이상, 허상이 아닐까 생각했다.
손에 잡힐 듯 안 잡히는 것.
그것으로 향하면 향할수록 방해자들이 넘치고 시기와 질투가 따라온다.
그것을 견디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지만 결국은 닿지 못하는 인간의 운명을 카프카는 몽환적인 모호함으로 말했을지도 모르다.
나의 이상, 나의 꿈들이 손에 잡힐 듯 눈앞에 있지만 그것은 결코 완전히 내 것이 되지 못하는 허상일 뿐...

실체 없는 위용을 자랑하는 <성>
그것은 바로 우리가 열심히 쌓아 올리고 있는 온라인의 공중누각이 아닐까?
어느 날 갑자기 데이터에 문제가 생기면 몇 년을 꼬박꼬박 기록해 놓은 것들이 싸그리 사라지는 그런 신기루 같은 것.
마을 사람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지만 결코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그 신기루.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세상.
그래서 항상 자고 일어나면 달라지는 한계치에 도달하지 못하고 계속 끌려가는 이 세상.
카프카의 세상을 몇 번 돌아봤지만 손에 잡힐 듯 명확한 것은 없었다.
그건 우리가 열심히 시간을 들여 꾸며대는 이 디지털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성>이라는 허울 좋은 공중누각을 향해 끝없이 걷고 걷는 디지털 유목민들.
현실에선 아무것도 없지만 그 세상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그곳.
이름 없는 K는 자기가 토지측량사라 우기고 그걸 또 <성>에서는 맞다고 해준다.
현실은 어떨지 모르지만 그 세상에서는 내가 원하는 가면을 쓰고 내가 원하는 누군가도 될 수 있다.
그래서 아는 거 같지만 전혀 알 수 없는 가면 쓴 사람들과 가면 쓴 나는 그렇게 <성>을 향해 나아간다.
"당신은 바보 아니면 어린애, 그것도 아니면 지독하게 교활하고 위험한 인간일 거예요."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는 인간의 마음들.
아마도 카프카는 도달하지 못할 허상을 좇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 거 같다.
카프카 자신도 밖에서는 '나 이런 사람이오'라고 말하지만 정작은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마주하며 스스로를 쥐어뜯은 게 아닐까.
처음에는 <성>이 어떤 모습으로 K를 받아들일까 궁금했지만 끝으로 갈수록 <성>은 도달할 수 없는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꿈을 좇다 늙어버린 수많은 영혼들이 머무는 곳이 바로 카프카의 <성>인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