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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5년 1월
평점 :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5/0122/pimg_7368641354579088.png)
그것은 의외로 양쪽 모두에게 이로운 결합이었다. 식물과 한 몸이 된 인간은 밤이면 영양이 풍부한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잠을 자고 해가 뜨면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음식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한편 식물은 인간의 팔과 다리를 얻었으므로 환경이 적합지 않으면 쉽사리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너의 유토피아>를 읽으며 나는 미래를 여행했다.
번역서들의 SF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현실의 문제들과 감정들을 유독 우리나라 작가들의 SF에서 느낄 수 있었는데 그건 정말이지 우리의 미래가 암울함과 동시에 어떤 희망을 자꾸 내포하는 기분이었다.
마치 나무들이 어떻게든 꽃가루를 날려서 암울한 미래를 숨 쉬지 못하게 만들면서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다.
정보라 작가의 작품은 세 번째다.
<저주 토끼>에서는 온갖 환상특급을 맛보았고, <지구 생명체는 항복하라>에서는 평소 와닿지 않았던 현실의 문제를 요모조모 이해하게 되었는데 <너의 유토피아>에서는 그저 또다시 나를 반성하게 되었다.
정보라 작가의 이야기엔 현실이 담뿍 담겨있다.
나와 상관없어 보이는 현실의 문제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경각심을 일깨운다.
오래 살고 싶은 인간의 마음은 <영생불사 연구소>를 읽고 나면 그렇게 오래 살 것도 못 되는구나 싶고,
이동하는 존재의 <너의 유토피아>를 읽으면서 먼 미래 인간이 놓쳐버린 인간적인 마음이 기계에 머물고 있음을 깨닫고,
<여행의 끝>에서 인육 바이러스로 인간이 살지 않은 지구에 홀로 남은 존재의 모습에 진저리를 치게 되고,
사랑스런 아내가 매일 나 모르게 알지 못하는 언어로 전화를 하는 <아주 보통의 결혼>을 읽으며 오만가지 상상의 끝을 보게 되고,
인간의 로맨스보다 더 진하게 느껴지는 기계의 짝사랑에 가슴이 시려 <One More Kiss, Dear>를 찾아 듣게 되고,
<그녀를 만나다>를 읽으며 잊었던 그녀의 죽음을 되새겨 보게 되고,
기억을 축출당하며 죽어가는 그녀를 위해 나도 같이 <Maria, Gratia, Plena>를 읊어보며,
<씨앗>을 읽으며 식물들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심오한 테러(?) 행위를 정보가 작가가 눈치 없게 글로 쓴 거 아닐까란 생각에 빠지게 된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5/0122/pimg_7368641354579089.jpg)
그러나 누군가는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보라 작가는 현장에서 직접 온몸으로 체험하는 작가다.
이미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에서 알아챘지만 <너의 유토피아>를 보면서 현장에서 체득한 경험들을 SF 속에 녹여내는 탁월함을 가진 작가라는 생각을 다시 확인했다.
8편의 짧은 이야기엔
우리 현실의 불편함이 담겼다.
'나랑 상관없는 이야기'로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가 곧 나와 상관있는 일이 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저런 종류의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저 모양이었던 걸까? 이제는 모두 생명공학을 통해 유전자 조작된 상태로 태어나는 걸 보면 아마 수정란 상태에서부터 저런 사람들로 엔지니어링되는 모양이다.
상식이 더 이상 상식이 아닌 세상의 맛을 보고 나니 이 문장 앞에서 그냥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야기를 읽어가며 하나씩 떠오르는 어떤 사실들이 가끔 발목을 잡고, 가슴을 두드리게 한다.
그래서 잊혔던 이야기들이 다시 소환된다.
우리가 사는 게 바빠서 신경 쓰지 않았던 우리의 모든 것들에 시선을 닿게 하는 힘을 지닌 <너의 유토피아>속 이야기들...
나는 다시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걸까? 란 생각을 곰곰이 해본다.
미래를 보여주면서 현실의 문제를 제기해 주는 정보라 작가님이 있어서 우리는 복받은 독자라는 생각이 든다.
동시대를 살면서 내 삶에 닿지 않은 문제들을 비슷한 시선에서 바라보게 해주는 작가님이 있어서 고마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