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기름
단요 지음 / 래빗홀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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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일은 본질적으로 집안싸움이죠. 인간이 하는 일이라면 뭐든지요."




이야기를 읽으며 멍해진다.

이 작가는 도대체 누구인가!

단요라는 특이한 이름의 작가.

내가 처음 읽는 작가의 글은 초반의 흡입력으로 인해 멋진 사이비 스릴러의 느낌이었다.

도박에 빠져 허우적대는 30대 남자. 최우혁

그를 도박의 세계로 인도한 김 형의 속죄로 우혁은 김 형의 학원에서 잡일을 하며 갱생(?)의 시간을 누리던 찰나 어린 시절 물에 빠져 죽은 우혁을 되살렸던 소년과 마주치게 된다.

세월을 비껴간 소년은 나이 들지 않은 모습으로 우혁의 눈앞에 나타나 자신을 도망시켜달라고 한다.

이상한 집단에 쫓기던 소년이 우혁이 몸담은 지 며칠 안된 학원으로 도망친 건 우연일까?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신학 타임~


소년은 분명 기적을 행할 줄 알았다. 그러나 권능에 비하면 놀라울 만큼 백치 같은 면모를 보이곤 했다. 초등학생만큼이나 단순한 사고방식과 기묘할 정도의 지혜가 공존한다는 평가가 알맞았다.



이 미지의 소년 이도유는 예수가 맞을까?

나는 종교적인 인간이 아닌지라 기독교에 대해 잘 모른다.

그래서 이야기의 초반까지는 신나게 읽었지만 그 이후로는 이해하며 읽느라 시간이 걸렸다.

한 번도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깊거나 얕게도 해본 적이 없어서 낯설었다.

그러면서 호기심도 강해졌다. 도대체 어떤 작가이기에 이렇게 심오할 수가 있을까?

사회 부적응자이자 도박 중독자인 우혁을 통해서 사이비 종교와 세상의 종말을 논하고, 그를 도박의 세계로 이끈 김 형을 통해 의리와 속죄와 책임감과 돌봄(?)을 추구하다니 도대체 이 작가의 정체는 뭘까?





나는 인간에게 풍요와 자유를 안겨다 줬다 ㅡ 심지어 나를 욕보일 자유마저도. 그런데 무엇이 문제일까? 왜 이들은 가지지 못한 것으로 끊임없이 불행해하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눌 줄 모를까?



두 번의 기적을 겪은 우혁.

두 번 부활한 우혁은 세상의 멸망을 환각을 통해 본다.

1999년 12월 31일은 멸망의 날이었다.

0과 1로 이루어진 컴퓨터가 2000을 인식하지 못해서 세상이 멈출 거라 했다.

다양한 방식의 종말론이 판치던 세기말.

그 당시 벌어졌던 집단 자살 사건이 이 이야기에 고스란히 전해진다.

마치 작가가 그 이야기의 목격자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아님 잠입 취재를 했나?

빈틈을 찾으려야 찾기 힘들었다.

어쩜 내가 기독교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못 찾았는지도 모르겠지만.

우혁과 조강현의 대화에서, 우혁과 김 형의 대화에서 다뤄지는 신학에 대한 이야기들은 독서모임 같은 곳에서 같이 읽고 토론하면 수많은 의견들이 오고 갈 거 같다.

우혁에게 기적을 일으킨 소년 이도유.

그를 쫓는 조강현과 새천년파.

그 사이에 낀 우혁은 소년 이도유의 탈출을 돕는다.

우혁은 이 세상의 종말을 멈출 수 있을까?


나는 대신 세상에 기대할 여지가 없다고 믿는 아이들을 돕고 싶다. 이 세상이 정말로 고통뿐이라 해도, 그 고통에서 희망을 찾아내는 법을 알려주고 싶다.



우혁은 김 형의 학원에서 전임강사를 맡는다.

예수님과 종종 대화를 하게 된 우혁은 이 세상의 새로운 감독이 된다.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집안싸움에서 비롯된다면 아이들의 유년기를 조금이라도 돕고 싶다는 그의 바람이야말로 작가가 독자에게 진정하고 싶은 말일 거라고 짐작해 본다.

정신의 세계 어딘가에 있는 심오한 터널을 지나온 기분이다.

이것이 소설임에도 어딘가 감독이 존재할 거 같다.

어쩌면 우리 사이에 섞여서 작은 기적을 일으키며 사람들이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라고 있지 않을까?

하늘의 눈이 된 우혁은 잠시 멈춰둔 종말의 시계를 다시 감아버릴 수도 있다.

나는 종말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일까? 아니면 그걸 막고 싶은 사람일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문제라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답답한 세상이 계속된다면 모든 사람의 마음에 세상이 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팽배해지겠지.

지금 우리의 현실이 그렇게 몰아가는 거 같아서 걱정스럽지만, <피와 기름>처럼 분명 세상의 멸망을 지켜내는 이가 있을 거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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