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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그늘
고광률 지음 / 파람북 / 2024년 11월
평점 :
사격을 당할 때마다 궁형 다리 밑에서는 비명과 통곡과 절규 속에서 수십 구의 시신이 발생했다. 개울은 시신에서 나온 선지피로 더욱 검붉게 변했다. 걸쭉해진 핏물은 흐르지 못하고 고여 굳어졌다.
피난민들은 시신을 방패 삼았다. 죽은 자의 시신을 끌어다가 자신의 몸뚱이를 덮거나 쌍굴 입구 쪽으로 밀어놓았다. 부모들은 각자의 어린 자식들을 감싸 안고 자신들의 등을 입구 쪽으로 돌린 채 웅크리거나 엎드렸다.
노근리 사건.
역사 교과서 근현대사에 한 줄 정도 적혀있었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주 4.3 사건을 <순이 삼촌>과 <작별하지 않는다>로 배워야 한다면 노근리 사건은 바로 <붉은 그늘>로 배워야 한다.
부끄러운 현대사를 나라에서 가르치지 않는다면 작가들의 이야기로라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 쌍굴다리 학살 만행은 26일 정오부터 29일 새벽까지 사흘에 거쳐 60시간 동안 자행됐다. 60여 시간 동안 쌍굴다리를 앞뒤로 포위한 채 500여 명의 갇힌 피난민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단 한 명이라도 살아서 밖으로 나오게 하지 말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한국 전쟁이 발발한 시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붉은 그늘>은 그 시대를 관통해온 한국인과 미국인 그리고 일본인을 통해 우리의 역사 한 귀퉁이에서 벌어진 사실들과 실존했을 거 같은 살아있는 인물들의 이야기로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양민 학살의 진실을 말하고 있다.
미군 하지스와 바커를 통해 미군이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후 베테랑 군인들을 모두 제대 시키고 초짜들로 일본에 머물며 승리국으로서의 자유를 누리다 벼락같이 터진 한국전쟁에 참여했지만 전투 경험도 별로 없는 군인들과 급하게 투여한 자격 없는 군인들로 파죽지세로 밀고 오는 북한군을 맞아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피난민들을 앞세워 남쪽으로 밀리다 결국은 자신들로 인해 삶의 터전을 버리고 피난 대열에 합류했던 대다수 일반인들 사이에 빨갱이가 섞여있다는 소문만으로 피난민들을 무차별 살상한 사건을 보여준다.
그것뿐이면 좋으련만 그 와중에 한국의 보물들을 닥치는 대로 약탈했던 군인들의 모습을 통해 이미 일제에 의해 모진 수탈을 당한 이 땅에서 아군이라 믿었던 미군에 의해 또 한 번 약탈을 당하는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정말 참을 수 없는 울분이 마음에서 들끓어 오른다.
도완구라는 인물을 통해서 일제 강점기에 밀정으로 활약하다 일본이 망하자 그들의 금괴를 가지고 고향에 내려왔으나 북한군이 밀고 내려오니 금괴를 숨기고 피난길에서 미군을 만나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보물지도를 그려주고 살아난 이 쓰레기 같은 작자가 휴전 이후 독립유공자로 탈바꿈한 억장이 무너지는 꼴을 보게 된다.
하봉자는 그 시대를 관통해온 가진 건 몸 하나뿐인 여자로서 부잣집 하녀에서 해방 후 양공주로 살다 노년에도 미군 기지에서 장사를 하며 여전히 미군을 상대하고 있다. 그녀에겐 혼혈 아들이 한 명 있는데 그의 아버지는 하지스였다.
하남득 하봉자와 하지스 사이의 혼혈아로 아버지가 죽은 줄 알고 있다. 그는 지체장애를 가진 아들 영수를 키우며 음악 학원을 겨우 운영하며 살고 있다. 혼혈이라 한국 사회 어디에서도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한 모습으로 나이 들어가다 58년 만에 만난 아버지를 죽인 혐의로 체포된다.
고노 마쓰오는 일본인으로 한국전쟁 때 미군의 통역병으로 일했다. 한국에서 살았던 그는 일어와 한국어, 영어가 가능했다. 미군은 그가 한국 실정을 잘 알기에 그의 말을 믿었고, 그는 바커와 하지스가 도완구에게 받은 보물지도로 금괴를 찾을 때도 그들과 함께 움직였다. 미군이 떠난 한국에서 주인 잃은 금괴는 고노의 차지가 되었고 그는 그 돈으로 부산을 근거지로 대통령 박정희의 전폭 지지를 얻어 사업가로 변신 IMF를 지나며 대부 업체를 저축은행으로 바꾸어 승승장구하는 중이다.
이 등장인물들의 삶을 따라가면서 대한민국의 흑역사를 들여다본다.
일제 청산이 되기 전에 한국전쟁으로 남과 북이 갈라지고 그 혼란을 틈타 일제의 앞잡이들이 정권을 틀어쥐고 서민들이 아닌 상위 1%를 위한 정치를 한 이 부끄러운 현대사는 그래서 역사 시간에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모양이다.
노근리
그 쌍굴다리 아래에서 사흘 동안 꼼짝도 하지 못하고 시체로 벽을 쌓아 목숨을 구하려 했던 피난민들의 억울함을 누가 풀어줄까?
우리는 알고 있다.
잘 만든 영화, 드라마가
잘 쓴 문학작품이 그 어떤 도구 보다 강력한 도구가 된다는 것을.
이 이야기도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수많은 사람들이 남녀노소 구분 없이 피난가라는 미군들 등쌀에 하루아침에 터전을 버리고 남하하던 사람들이 이승만에게 속아 죽고, 미군에게 속아 죽었다.
그 죽음들은 적들에 의한 죽임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