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끝
히가시야마 아키라 지음, 민경욱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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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명은 2173년 6월 16일에 종말을 맞는다.



소행성 나이팅게일의 충돌을 막기 위해 인류는 핵미사일을 쏘아 소행성을 맞췄으나 그 잔해가 지구로 떨어지면서 지구는 절반 이상이 사라지고 만다.

인류가 이뤄왔던 문명이 파괴되고, 살아남은 사람들 중 일부는 살기 위해 인육을 먹기 시작한다.

백성서파에 몸담고 있던 네이선은 화이트라이더로서 백성서파가 지목하는 이들을 처단하는 임무를 맡지만 아내가 목사에 의해 산 채로 불타 살해당한 충격으로 얼이 나간 상태로 10년을 보내다 친구에게 의뢰를 받고 옛날 방식의 '책'을 쓰기로 한다.

이 이야기는 네이선이 식인을 긍정하는 새로운 구세주 블랙라이더를 추적하면서 쓴 그의 일대기이자 멸망한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캔디선 안의 사람들은 식량을 배급받고 비교적 보호받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도 각종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캔디선 밖의 사람들은 식인을 하며 옛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나는 캔디선 안의 사람들 보다 그들이 좀 더 자유로와 보인다.



블랙라이더란 캔디선 밖에 사는 사람들이 인간답게 존재하기 위해 ㅡ 이를테면 식인하더라도 사람을 사랑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가족을 지키고 편안하게 숨을 거두기 위해 ㅡ 그들이 새로 쓴 복음의 한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블랙라이더 네새니얼 헤일런.

폭력과 강간으로 태어난 아이.

이 소년은 구세계 희대의 식인 살인마 대니 레번워스와 함께 다니며 사람들에게 식량을 나눠준다.

네이선은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가 식인을 하는 인간들에게 어떻게 신격화되었는지를 적어간다.

작품속 세상은 끔찍하지만 왠지 있을법한 미래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류>에서 이미 아키라의 필력을 맛보았기 때문에 이 거부감 드는 소재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빠져들어 읽었다.

그의 묘사와 표현들이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며 너새니얼 헤일런이라는 인물을 멸망한 지구의 예수처럼 만들어 내는 솜씨는 감탄스럽기까지 하다.




그는 오렌지주스를 꺼내면서 생각했다.

텅 빈 세계는 텅 빈 냉장고에서 슬금슬금 시작되고 있다고.



이 표현처럼 앞으로 다가올 지구의 운명을 잘 표현한 게 또 있을까.




"내가 당신에게 저주를 걸지. 당신은 앞으로도 사람을 먹을거야.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을 구하게 될 거야."



너새니얼의 이 말은 식인으로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말과 같다.



어머니를 살해한 한낱 범죄자에 불과한 사람이 어떻게 신격화되었는가. 나는 무엇보다 그것을 해명하고 싶었다. 그럼으로써 캔디선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비장한 심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현재처럼, 불안정한 상태의 선택이 논란의 여지가 안 되는 시대가 언제까지나 이어지리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엔 많은 성경 문구와 인용문들이 나온다.

이야기 속의 상황과 스탠리 밀그램의 <권위에 대한 복종>의 실험 결과를 비교한 장면은 우리가 어떤 시선으로 이 이야기를 해석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캔디선 밖의 사람들이 처한 상황은 먹지 않으면 먹힐지 모르는 상황이다.

배고픔 앞에서 식인은 이미 인류의 DNA에 오랫동안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펄 벅의 <대지>에서도 식인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한 소년의 이야기와 멸망한 지구의 풍경과 그를 쫓던 사람이 나중에 그 소년의 일대기를 적어가는 과정은 그 모든 걸 이해하기 위한 이야기였다.

네이선의 마지막 글들은 결국 '이해'를 말하고 있다.

다름을 선택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

멸망한 세상에서조차 분열된 가치관으로 서로를 적대시하는 게 아니라 그들을 이해함으로써 포용해가는 것.

그것이 작가가 현실의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이야기를 읽을수록 인류의 역사를 다시 되짚어 보는 기분이 들었다.

지구가 멸망해도 살아남은 인류는 다시 문명을 회복해나갈 것이다.

<죄의 끝>은 멸망 속에서 탄생한 새로운 현실이다. 그 현실 속에서 살다간 한 소년의 모습이 내내 마음에 남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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