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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귀신 부르는 심부름집의 일일 - 이소플라본 연작 기담집
이소플라본 / 황금가지 / 2024년 8월
평점 :
장승처럼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나무와 같은 몸이 좋을테지. 오백 년 후에 들을 네 답을 기다리겠다.
오컬트 전문 심부름센터엔 키 190이 넘은 장승같은 사장 혜호와 온갖 궂은일은 도맡아 처리하는 승환이 있다.
그리고 사무실엔 거의 들리지 않고 밖에서 사장의 일을 돕는 철규와 신묘한 신기와 영험함을 지닌 부적을 쓰는 신녀가 있다.
이 네 사람이 꾸려가는 오컬트 전문 심부름센터엔 다양한 사람들이 황당하거나, 괴이한 사연을 들고 찾아온다.
사람을 주술로 묶어 영원히 일하게 하는 마을
자식의 죽음을 미루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불태운 어미.
아이 못 낳는다고 구박받던 며느리는 도깨비의 자식을 납치하고,
가문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고아를 데려다 신내리를 시킨 무가 등등 현실에 있을 법하지 않는 일을 겪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황금가지 브릿 G에서 전자책으로 나온 <귀신 부르는 심부름집의 일일>은 연작 기담집이다.
16편의 이야기가 담긴 이 작품의 작가는 이소플라본. 데뷔작인데 정말 놀라운 이야기를 선보인다.
<신은 인간을 사랑할까?>
온갖 신들이 주는 잡다한 시련을 겪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오컬트 심부름센터.
저주에 걸리고, 주문에 걸리고, 신의 노여움에 걸린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그들의 사연을 듣고, 그들을 괴롭히는 '뭔가'를 찾아 사건을 해결하는 이 심부름센터의 하루하루는 바람 잘 날 없다.
우리의 민속신앙과 우리나라 고유의 신들을 엮어 기이하지만 가슴 뭉클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 이소플라본 작가는 우리나라 오컬트 장르의 대가 박해로의 뒤를 잇는 작가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심부름센터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사연을 풀어가는 것도 재밌지만 이 심부름센터에 모여있는 사람들의 얘기를 마주하는 일이 더 재밌다.
각자의 사연들이 밝혀지는 지점에 이르면 이들과 헤어지기 싫어질 정도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바란다.
이 연작 시리즈를 관통하는 건 신이 과연 인간을 사랑하는가?이다.
인간을 사랑한다면 어째서 신은 인간을 옳은 길로 인도하지 않는가?
어째서 인간을 시련에 들게 하고, 악에 물들게 하고, 그리고 벌을 주는가?
소원을 다오.
내게 소원을 빌어 주겠느냐?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래된 나무, 어딘지 달라 보이는 특이한 돌, 좋은 소식을 물고 온다는 새, 맑고 투명한 샘물 등등 뭔가 특별해 보이는 자연에 대해 소원을 빈다.
그 소원으로 태어난 신들은 소원을 먹고 산다.
그러나 인간들은 점점 자연에 소원을 빌지 않는다.
인간의 염원으로 신이 되었으나 점점 굶주리는 신들은 그 굶주림을 참지 못해 점점 사특해진다.
두억시니, 어둑시니, 금란장, 바리데기, 동수자, 영노 등등
들어는 봤지만 어떤 존재인지 몰랐던 이름과 들어보지도 못했던 이름들이 주는 효과가 아주 탁월한 이야기였다.
오컬트 심부름센터를 운영하는 이들의 사연이 의뢰인들보다 강렬했고, 인간의 소원을 구걸하는 작은 신들의 모습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연휴 동안 짬짬이 읽었던 <귀신 부르는 심부름집의 일일>은 나에게 새로운 장르의 문을 열어 준 거 같다.
해외 오컬트가 어딘지 모르게 공포를 조장하는 이야기라면 우리 오컬트는 어딘지 모를 짠함과 인간미와 다정함을 곁들인다.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지에 대한 답을 얻으려 500년을 인간 세상에서 보냈던 이보다
그의 곁에서 짧은 시간을 보낸 이에게서 듣고 싶은 답을 들은 신의 웃음.
죄를 지은 사람은 당연히 벌을 받게 마련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벌이 없다고 안심하면 안 된다.
신은 절대 죄악을 그냥 넘기지 않는다.
신들의 꽃밭에도 악의 꽃은 핀다.
모든 악은 그렇게 숨어서 피어난다.
그러니 신조차도 그것을 다 막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에게 주어진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요긴하게 쓸 수 있는 무기인 것이다.
모든 게 우리의 선택이다.
어떤 걸 선택하든 우리에겐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 선택권을 어디에 두는지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
그것은 그 어떤 신도 막을 수 없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 듯..
인간의 세상이 변해가면 옳고 그름도 달라진다는 걸 신들은 알고 있음이다.
그것이 그들이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