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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주식회사
잭 런던 지음, 한원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평점 :
"관건은 이 조직이 조직의 창조자인 나보다 더 우세할 것인가?가 되겠군. 조직이 창조자를 죽일 것인가, 아니면 창조자가 그보다 한 수 앞서나갈 것인가?"
잭 런던의 <암살 주식회사>는 그 시대가 아니었다면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무명작가에게 70달러를 주고 사들인 14개의 이야기 개요 중 하나를 끝까지 완성시키지 못하고 떠난 잭 런던.
그 이유는 이 소설의 결말을 논리적으로 끝내지 못할 거 같았기 때문이란다.
도대체 뭔 소설이기에 논리적으로 끝나야 할까? 싶었는데 책을 읽다 보니 잭 런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다.
나 역시도 이 논리에 빠져서 과연 끝이 어떻게 맺어질지 이렇게 끝나도 문제, 저렇게 끝나도 문제라는 모순된 생각에 빠져버렸다.
자신들을 암살자가 아닌 처형자로 생각하는 암살 조직이 있다.
백만장자 사회주의자인 홀은 그 암살 조직을 찾아가 의뢰를 한다.
이반 드라고밀로프를 암살해달라고.
드라고밀로프는 바로 암살 조직의 수장이었다.
그리고 홀이 사랑하는 여자 그루냐의 삼촌이자 아버지였다.
초반의 이 어이없을 정도로 황당한 상황은 애교였다.
그 뒤에 이어지는 암살단들의 활약은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해?라는 의문을 가지게 한다.
철저하게 의뢰받은 사람들을 검사하고 사회에 해가 되는 자들만 처단하는 처형자들.
그들 어디에서도 암살자라는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저명한 학자이거나 사회적으로 덕망 있는 신사들로 보일 뿐.
드라고밀로프는 스스로 자기를 암살하라는 지령을 조직에 내리고 자기를 암살해달라 의뢰한 홀에게 사무장직을 맡긴 채 홀연히 자취를 감춘다.
게다가 자신의 조카이자 딸인 그루냐의 안위까지 홀에게 떠맡긴다.
조직이 1년 안에 자신을 죽이지 못하면 위약금을 물어주고 조직을 해산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것은 실로 드라고밀로프가 스스로 쌓아 올린 하나의 세상을 파괴할 것인지 생존시킬 것인지에 대한 싸움이다.
그가 혼자서 원칙에 따라 일구어 놓은 암살 조직은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평범한 삶을 영위하면서 위험한 일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읽고 있자면 묘하게도 그들에게 동화되고 만다.
"사상을 해체할 순 없네. 신념도 마찬가지."
잘못된 이유로 잘못됐던 적은 결단코 없었어. 잘못된 가운데서도 공의가 존재했기 때문이지.
<암살 주식회사>의 21세기 버전이 나온다면 어떻게 전개될까?
이들처럼 서로를 존중하면서 자신의 일에 확고한 신념을 가질 수 있을까?
자신들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광기에 사라 잡힐 수 있을까?
이 21세기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이야기일 거 같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나 보다.
이들의 젠틀함과 우직함이 21세기 독자들의 마음까지 사로잡는 비결이 되었다.
<암살 주식회사>를 읽으며 해피엔딩을 꿈꾸는 나를 본다.
암살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낭만적으로 들리다니..
잭 런던이라는 이름으로 쓰인 글들을 모두 읽어 보고 싶어진다.
그들이 모여 휴전을 하고 식사를 하면서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잊히질 않는다.
그곳에서 몹쓸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갖게 하는 그들의 행동이 낯설면서도 매력적이다.
웃픈 암살 조직 단원들의 모습이 뇌리에 짙게 남는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