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테노르가 테아노의 말을 들었다면,
프리아모스가 헤카베의 의심을 받아들였다면,
수많은 남자들이 여자들의 말을 듣지 않아서 긴 세월을 신들에게 놀아났다..
아들과 남편을 잃고, 노예가 되어 트로이아를 떠나야 했던 여자들.
헬레나 하나 때문에 남편과 아들을 전쟁터로 내보내야 했던 여자들.
전쟁이 끝난 후 돌아오지 못한 남편과 아들을 가진 여자들.
외간 남자랑 바람난 여동생 때문에 전쟁의 제물로 바쳐진 딸을 가진 여자.
오랜 세월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던 여자.
아폴론의 수청을 거절함으로써 능욕 당하고 미래에 대한 예언을 하지만 아무도 예언을 기억하지 못해 미친년처럼 살게 된 여자.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구혼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여자.
님프였지만 양치기 남자를 사랑해서 아이까지 낳았지만 그 남편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에게 미쳐서 버림받은 여신.
모든 신들에게 왕따 당해서 속상했던 여신.
인간을 품고 풍족하게 해주었지만 인간들의 탐욕에 지쳐버린 여신.
아들 하나 때문에 많은 아들과 남편과 딸들의 죽음을 목격해야 했던 여자.
아킬레우스 못지않은 영웅의 아내였지만 자기 부모를 죽인 남자의 아들에게 자신의 아들을 잃고, 그 남자의 노예가 되어야 했던 여자.
수많은 여자들의 목소리로 듣는 트로이아 전쟁을 읽는 내내 깊은 슬픔과 상실감이 느껴졌다.
끝없는 인내와 고통을 느끼게 되는 <천 척의 배>
그 어떤 트로이아 전쟁을 그린 이야기에서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을 <천 척의 배>로 느꼈다.
목숨 빼고 모든 것을 다 잃은 여자들의 이야기가 트로이아 전쟁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신들의 안배에 놀아난 인간 남자들.
현명한 여인들의 말을 새겨 들었다면 이런 전쟁은 없었을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신들의 뜻을 어찌 꺾을 수 있을까 싶다.
모든 것은 현명한 자들과 어리석은 자들의 엇박자의 춤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