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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치카·스페이드의 여왕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4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박종소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소네치카>
키가 크고 볼품없는 소녀 소네치카에겐 책이 전부였다.
책 세상에 빠져서 독특한 개성을 지녔던 소네치카.
그녀의 진가를 한눈에 알아 본 로베르토 빅토르비치.
유대인 화가로 프랑스에서 명성을 얻은 빅토르비치는 러시아로 귀국해서 수용소 생활을 5년간 마치고 보호관찰 기간 중에 있는 중년이었다.
책벌레 소네치카는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던 와중에 도서관을 찾은 빅토르비치에게 선택(?) 당해서 결혼하게 된다.
마치 현자의 돌을 만지기라도 한 것처럼 늦은 밤 아내와의 대화는 과거를 정화하는 마법이었다.
원석을 알아 본 빅토르비치와 소네치카의 결혼은 서로의 존중과 신뢰를 얻었다.
전쟁 속 궁핍을 견디며 서로의 충만한 시간은 아주 짧게 흘렀다.
아이가 생기고 책과 멀어진 소네치카에게서는 예전의 지적인 모습은 찾을 수 없게 되었고, 예술가인 빅토르비치에게 그녀는 더 이상의 영감을 주지 못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딸 타냐는 커가고, 세상은 변하고, 타냐의 친구 야샤는 소네치카의 그늘 안에서 가족이 되어간다.
그러나.
운명은 그렇게 좋은 것들만 남겨두지 않는 법.
빅로트비치의 뮤즈가 된 야샤는 친구의 아빠를 유혹하고, 그들의 기묘한 동거는 그렇게 시작한다.
러시아인 소네치카
유대인 빅토르비치
자유로운 영혼 타냐
어릴 때부터 살아남는 법을 배워왔던 폴란드인 야샤.
무너져가는 러시아
세상 곳곳의 돈줄을 쥐고 있는 유대인
어디 한곳에 속하지 못하고 계속 방황하는 혼혈인 타냐
끈질기게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이민자 야샤.
소네치카의 결정을 이해하는 나, 그 이해 안에서 묘한 안도를 감지하는 나.
울화통이 터지는 와중에도 이해와 안도는 나에게 물음표만 던진다.
왜?
소네치카는 왜 그랬는데?
유대인은 예술작품을 남겼고
과거의 러시아인은 그 모든 것을 아우르며 지켜내고
러시아인과 유대인의 피를 가진 자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거듭나고
어딘가에서 러시아로 흘러들어 온 이민자는 자신의 고향으로 향한다.
러시아의 근대사를 한 가정으로 압축시킨 소네치카.
러시아 여자들 알고 보니 우리네 할머니들 보다 더한 삶을 살아냈구나...
전쟁은 여자들을 목석으로 만들어 놓고
그저 살아가야만 하는 현실을 남겨두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살아가야지... 몸이 자유자재로 움직여지지 않는 상황이 되어도 목숨이 붙어 있는 한은 그렇게라도 살아내야 하는 법이지...
<스페이드의 여왕>
"아넬랴, 미칠 것 같군! 온 세상이 변해서 모든 것이 바뀌었는데 이 집만은 그대로야."
무르. 스페이드의 여왕으로 불리는 여자.
러시아의 높은 지위에 있는 예술가들을 자기 아래 무릎 꿇린 여자.
딸 안나에게서 아버지를 빼앗은 여자.
쭈그렁 할망구가 되어서도 온 집안 여자들을 닦달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한 여자.
안나 표도로브나.
안온한 아버지의 품에서 무르에 의해 새아버지 품으로 옮겨야 했던 여자.
무르의 행실로인해 평생 남편 마레크 외의 남자는 없었던 여자. 그럼에도 무르 때문에 마레크와 이혼해야 했던 여자.
안나 역시 딸 카탸에게서 아버지를 빼앗고 만다. 본의 아니게.
카탸 역시 딸 레노치카에게서 아버지를 빼앗는 일을 해버리고 얼굴 없는 남자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는다.
이 집엔 4명의 여자와 남자아이가 살고 있다.
그리고 30여 년 전에 헤어진 마레크가 방문을 한다.
한 시대를 자유롭게 휘두르며 살았던 무르는 아직도 과거의 영광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고
그 변덕스러움을 맞춰주며 살얼음판을 살고 있는 안나와 타냐와 레노치카에게 찾아온 마레크.
과거의 러시아가 무르라면
현재의 러시아는 안나와 카탸이고
미래의 러시아는 레노치카로 치환된다.
과거는 아직도 현재를 휘두르지만 미래는 감당하지 못할 터.
안나는 자기대에서 이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마레크의 초대를 받아 그리스로 향할 계획을 세운다.
무르의 반대를 잠재우기 위해 무르를 속이는데 성공하고, 그리스로 떠나는 준비를 착착 진행시킨다.
과거의 끄트머리였던 안나는 그리스 여행을 떠나는 날 새벽에 무르가 마실 커피에 들어갈 우유를 사러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다.
안나의 비밀 여행을 알게 된 무르는 난리 법석을 피우지만 타냐의 손길이 무르의 뺨을 치는 순간 과거의 영광도 사라지고 만다.
누군가는 과거와의 단절을 진행해야 한다.
미래를 위해서...
그 진행을 위한 희생은 불가피한 것.
소네치카와 스페이드의 여왕
두 편의 이야기는 그냥 읽으면 별 소득이 없다.
러시아의 근현대사를 접목하면 아주 색다르게 느낄 수 있다.
작가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자신이 러시아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산 작가다.
그 안에서 여성들의 이야기를 통해 러시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 내다보았다.
어쩜 흔하디흔한 이야기처럼 들리는 이 짧은 단편에서 내가 너무 무식하게 거대한 덧칠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덧칠로 이루어져 있음이다.
누가 덧칠을 하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법이다.
우리 할머니와 엄마들만 고달픈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러시아 여성들도 굴곡진 세월을 정통으로 맞받아치며 살아냈다.
21세기에 여자로 사는 게 힘들다는 말은 그들 앞에서 명함도 내밀지 못하겠다...
과거의 영광은 과거에 묻어 두길.
그놈의 과거의 영광 찾자고 영국은 브렉시트로 만신창이 되어가고
러시아는 전쟁 2년째.
결국 그래봐야 뼈 때리게 개고생하는 건 모두 국민 몫.
정치하는 작자들이 총 들고 싸우는 법 없고
돈 없어 배곯는 일 없다.
그러니 민생도, 전쟁도 지들 꼴리는 대로 할밖에...
울 엄마 연세인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작가님
여성 서사로 러시아 정세를 돌려까기 하시는 솜씨가 있으심.
다른 작품도 읽어 보고 싶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