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이하의 것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호영 옮김 / 녹색광선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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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평범한 것들'에 대해 말하고, 어떻게 그것들을 더 잘 추적하고 수풀에서 끌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그것들을 끈끈하게 감싸고 있는 외피에서 떼어내고, 그것들에 하나의 의미, 하나의 언어를 부여할 수 있을까. 마침내 그 평범한 것들이 자신이 무엇인지, 우리가 무엇인지 말할 수 있도록 말이다.

 

 

 

<사물들>이 아니라 <보통 이하의 것들>로 페렉을 만난 것도 인연인 거 같다.

이 책이 페렉이 어떤 사람인지를 더 잘 보여주는 거 같으니까.

에세이라고 하기에도 안 어울리고 그저 끄적임 정도?

그 끄적임도 페렉이기에 책이 되는 것이지.

 

인상적인 대목은 빌랭 거리와 엽서들이었다.

 

빌랭 거리를 읽으며 영화 <스모크>가 생각났다.

하비 케이틀이 매일 하루도 빼지 않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찍는 사진 한 장.

인물만 다르게 찍힌 이 사진이 어떤 걸 뜻할지 아무도 몰랐다. 모아 보기 전에는.

그 사진 자체가 하나의 역사가 된다는 사실이 짜릿했다.

 

페렉에게 빌랭 거리가 있었다면 내게는 대학로가 있다.

빌랭 거리는 페렉이 어린 시절 살았던 곳이고 그곳엔 어머니가 하셨던 미장원이 남아 있었다.

사람은 사라지고 장소만 남은 거리 빌랭...

그러나 그는 그곳을 쉬이 찾아갈 수 없었다.

그러다 빌랭 거리의 철거가 결정되고 그는 그곳이 사라질 때까지 그곳에 대한 기록을 한다.

'장소들'은 그렇게 태어났다.

 

페렉이 기록한 빌랭 거리를 읽으며 내 머릿속에는 대학로 거리가 떠올랐다.

지하철 공사가 한창이었던 시절과 젊음의 거리로 탈바꿈 한때

늘 사람에 밀려다녔던 그때의 대학로는 활기차고 열정적이었다.

지금 그곳은 비어 있는 가게들이 즐비하고 사람들의 발길이 현저하게 줄어든 곳이 되었다.

얼마 전 대학로를 다녀와서 <보통 이하의 것들>책을 읽어서 그런지 더욱 빌랭 거리와 오버랩 되면서 마음이 쓸쓸해졌다.

페렉은 빌랭 거리의 건물들을 번지수와 간판으로 적어갔지만 내가 대학로를 기록한다면 어느 건물은 누구네 집으로 어느 골목은 친구들과 고무줄과 땅따먹기를 했던 곳으로 기록될 것이다...

 

<생생한 컬러 엽서 이백사십삼 장>

일정한 형식을 띤 엽서들의 구성을 조합해서 243개의 엽서가 탄생했다.

한 페이지에 5개의 엽서들이 담겼다. 펼치면 열 개의 엽서들이 날개를 달고 날아다닌다.

처음에는 무심코 읽다가 점점 수많은 인물들의 목소리가 날갯짓을 한다.

마치 영화 <러브 액츄얼리>의 인트로와 라스트 부분에 나오는 공항 씬에서 많은 사람들의 만남을 보여주는 영상처럼 저마다의 목소리로 사람들이 엽서를 보낸다.

 

어느 나라의 어떤 호텔에 있어.

아주 즐겁게 보내고 있어.

언제쯤 돌아갈 거야.

키스를 보내.

 

이 짤막한 글들이 다양한 언어로 자동 플레이 되면서 수많은 얼굴들이 스쳐 지나간다.





실험적인 글들이다.

제목처럼 우리가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들에 생명을 불어 넣으면 생기는 어떤 힘을 보여준다.

아무도 알려 하지 않았던 것들을 앎의 세계로 치환시킨 페렉의 열정.

 

이런 기록들이 아주 먼 미래의 사람들에게 가장 정확한 기록이 되지 않을까?

20세기 사람들이 살았던 곳, 좋아했던 음식, 거리 풍경, 그들의 소통 방식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자료.

페렉은 어쩜 이 <보통 이하의 것들>로 먼 미래 세대에게 교과서적인 인물로 남을지 모르겠다.

 

기록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책이었다.

페렉은 하나의 다큐를 글로 남겼다.

 

가본 적 없지만 빌랭 거리가 머릿속에서 그려지고

먹어 본 적 없지만 페렉이 1년 동안 먹은 음식이 어떤 건지 글로나마 알 수 있다.

페렉과 동시대에 살던 사람들 역시 그 거리를 걸었고, 그와 같거나 비슷한 음식을 먹었을 테니, 지금 당장 우리에겐 의미 없는 기록 일지 모르지만 이 기록들은 미래에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무심히 지나치는 것들에도 의미를 주었던 페렉.

나는 무엇에 그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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