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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궁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시공사 / 2023년 10월
평점 :
누가 그 여인들을 죽였을까? 범인은 대체 어떤 이유로 그들을 살해하게 됐을까? 뿌예진 눈으로 나는 지저분하고 딱딱한 얼굴의 행인들을 바라봤다. 남자들, 여자들, 아이들. 그들도 내 쪽을 힐끔거렸다.
나는 끔찍한 비밀이 숨겨진 세계에 발을 들이고 말았다.
형조판서의 서녀이자 내의녀인 백현.
그녀는 어느 밤 동궁전으로 불려간다.
아픈 세자를 돌보러 도착한 동궁 처소엔 세자 대신 늙은 내관이 있었다.
세자빈의 함구령으로 그날 밤을 세자 처소에서 치료를 하며 보낸 이후 퇴궐을 하다 백현은 혜민서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마주친다.
난도질당한 의녀들과 용의자로 몰린 백현의 스승.
그리고 세자가 범인이라는 괘서가 사방에 붙는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스승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사건을 수사하기로 결심한다.
그런 백현 앞에 나타난 서종사관은 18세에 과거에 급제한 영재였다.
변장에 능한 종사관과 동갑인 백현은 사건을 함께 수사하기로 하는데...
처음엔 사도세자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다루는 작품일 거라 지레짐작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사도세자의 죽음보다는 그가 처한 상황과 그가 저지른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었다.
<붉은 궁>은 2023년 에드거 앨런 포 어워드 수상작이다.
로맨스추리사극이라고 해야 할까? 굳이 장르를 정한다면 말이다.
익숙한 듯 어딘지 낯선 이야기라 느껴지는 건 아마도 우리의 시각과는 다르게 전개되는 이야기 때문이다.
사실 조금 고증이 부족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어쩜 내가 가진 고정관념 때문에 그리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생각했던 조선 시대가 <붉은 궁>에서처럼 훨씬 더 자유스러웠을지도 모르니까.
백현과 서종사관의 노상에서의 키스신도 어색하지만 그만큼 그럴싸했다.
백현과 의진과의 로맨스
사도세자와 영조와의 불편한 관계
남편의 광기로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는 세자빈
왕과 세자의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후궁
궁 곳곳에 퍼져있는 첩자들과 사사건건 자신을 망신 주는 아버지로 인해 무너져가는 세자
어떻게든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어서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려던 서녀의 복잡한 마음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었다.
그래서 <붉은 궁>의 결말이 맘에 들었다.
해외 한국계 작가들이 가진 매력이 여기에 들어 있다.
우리가 우리 시각으로 보는 역사와 밖에서 보는 역사의 시각이 다르지만 같게 스며있다.
좀 더 생각의 자유로움이 담긴 이야기라서 신선하면서도 재미있었다.
<붉은 궁>은 '신선한 피' 같다.
고정관념에 새로운 수혈을 해냈다.
역사적인 사건에 기대에 허구의 인물들로 복잡한 시대를 관통시켰다.
짧은 에피소드로 사도세자의 심정을 잘 풀어냈고, 그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의 모습을 잘 그려냈다.
어쩜 그 시대에 정말 백현과 같은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인영의녀와 같은 이들도 있었을지 모른다. 기록되지 않아 잊힌 이야기들이 <붉은 궁>을 통해 소생한 느낌이다.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신선한 감각으로 되살아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