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받은 피 에를렌뒤르 형사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지음, 전주현 옮김 / 영림카디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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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로 그다.'

 

 

 

"전형적인 아이슬란드식 살인사건 아닙니까?"

"비열하고, 무의미하고, 아무것도 숨기려고 하질 않았잖아요. 증거인멸이나 단서를 꼬아놓은 것도 아니고."

"그렇지. 조잡한 아이슬란드식 살인이지."

 

 

그렇게 단순해 보였던 살인사건은 그 깊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오랜 세월을 거슬러 간다.

50대 이혼남 에를렌두르 형사.

이 형사의 매력은 뭘까?

 

속 시원하게 설명해 주는 맛도 없고, 부하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도 없고, 능숙한 말주변도 없는 에를렌두르 형사.

피살된 피해자에게서 발견된 쪽지.

쪽지엔 '내가 바로 그다.'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단순해 보이던 살인사건은 그 쪽지로 인해 단순해지지 않는다.

피해자를 조사하다 보니 그가 전에 강간죄로 고소당한 적이 있음을 알게 된 에를렌두르는 살인자를 찾는 대시 피해자의 과거를 파헤친다.

 

'과거란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세계'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지금에야 그 뜻이 이해가 갔다. 시간은 흐르고 사람도 변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를 지워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거짓 화술로 여자들을 홀리고, 여자들을 집에 데려다주는 신사적인 행동 뒤에 따른 강간.

그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그녀들의 몫.

그중 단 한 명만이 그를 고소했고, 부패한 경찰은 철저하게 피해자의 의견을 묵살한다.

결국 그녀는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는 4살 되던 해에 뇌종양으로 사망한다.

이 과거의 사실이 현재 재떨이에 맞아 죽은 피해자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북유럽 스릴러를 자주 접해봤지만 아이슬란드의 스릴러는 뭔가 살짝 다르다.

그들의 생활방식보다는 단일민족인 아이슬란드 사람들의 유전학적인 부분에서 다른 소재들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함이 느껴진다.

 

왜? 어째서? 현재 일어난 사건의 범인을 찾을 생각을 안 하고 피해자의 과거 따위를 추적하는지 알 수 없는 동료들은 짜증스럽지만 그래도 에를렌두르의 지시를 착실하게 따른다. 그것 역시도 다른 스릴러들의 분위기와는 또 다르다.

 

"어쩌면 여기 정말 간단한 해답이 있을지도 몰라. 어떤 미친 자식의 소행일 수도 있지. 그러지만 내 생각에 이 사건은 아니라고 봐. 살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뿌리가 더 깊을 수도 있어 전혀 간단한 사건이 아닐지도 몰라. 어쩌면 모든 해답이 홀베르그라는 인물과 그가 과거에 저지른 일에 놓여 있을지도 몰라."

 

 

에를렌두르의 매력은 매력이 없어 보인다는 게 매력이다.

 

약에 취해 그를 찾은 딸.

자신의 일에 상관 말라는 딸.

그런 딸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에를렌두르는 사건을 파헤칠수록 딸에 대한 애틋함과 스스로를 악의 소굴로 빠뜨리는 딸에 대한 분노도 내비친다.

그가 부엌에서 딸에게 한바탕 화풀이는 하는 장면에서 그가 무섭다기보다는 애처로운 것도 그 이유다.

 

아이슬란드식 부모 자식 간의 대화는 내 가슴을 탕탕 치게 만들지만 그것 또한 그들의 정서.

그나마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 동안 딸과의 관계도 호전되는 것이 이 이야기의 위로라면 위로라고나 할까?

 

잘도 오랫동안 요리조리 빠져나가면서 용케 목숨을 보전했던 죽어 마땅한 놈은

결국 그렇게 자신이 뿌린 씨(?)를 마주하게 된다.

 

<저주받은 피>를 읽으며 어째서 피해자는 여자들인데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하고 비밀을 지켜내야만 하는 것도 여자들인지.

왜. 그 여자들에게 뒤늦게라도 알게 된 사람들은 화를 내는지.

왜. 무능하고 부패한 경찰의 뒷배를 봐주는 무리들이 있는 건지.

그런 경찰 때문에 힘들게 찾아간 강간 피해자가 2차 피해를 입게 되는 건지.

어째서 이런 일들은 세계 곳곳에서 시간과 상관없이 자행되고 있는지.

왜. 피해자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는지.

오만가지 생각들에 휩싸였었다.

 

졸지에 살인자가 된 사람에게 드는 안타까움과 그들의 고통에 대해 그 누구도 책임질 수 없음에 그저 먹먹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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