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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레이철 ㅣ 워프 시리즈 5
팻 머피 지음, 유소영 옮김 / 허블 / 2023년 4월
평점 :
상상해 보지 못한 이야기들이 한가득~!
"넌 밖에 나가면 안 된다. 네가 살기에 좋지 않은 곳이야. 세상은 속 좁고 옹졸하고 멍청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 사람들은 널 이해하지 못할 거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를 해치려 들어. 자신과 다른 존재를 미워한다. 네가 다르다는 걸 알면, 네게 벌을 주고 해치려 들 거야. 널 가두어 놓고 절대 내보내 주지 않을 거다."
올 상반기에는 좋은 단편집을 많이 만났는데 그중 최고가 바로 <사랑에 빠진 레이철>이다.
팻 머피.
그녀의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들어 본 적 없지만 어디에나 있는 이야기였다.
1987년에 네뷸러 상을 수상한 표제작 <사랑에 빠진 레이철>의 정체를 알게 된 순간 온몸이 찌릇찌릇했다.
그리고 레이철이 겪게 되는 일들 앞에서 인간으로서 저지르는 끔찍함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침팬지 속에 갇힌 어린 소녀의 성장기.
침팬지에게 죽은 자신의 딸의 뇌 전기장을 덮어 씌워 되살려낸 애런. 그래서 인간과 침팬지 두 가지 기억을 갖게 된 레이철.
수화로 대화를 하고 글도 읽고 쓸 줄 알지만 목소리는 낼 수 없다. 아빠 애런의 죽음 뒤에 유인원 연구소에 실려간 레이철이 겪는 일들은 동물 학대의 매 순간을 표현하고 있다.
인간이 아닌 동물이기에 그 어떤 실험에도 죄책감을 갖지 않는 인간의 모습에 레이철이 투영된다.
현명한 레이철은 청소부 제이크에게 연정을 품지만 결국 자신에게 살뜰하게 구애하는 침팬지 존슨과 함께 연구소를 도망친다.
침팬지이자 인간인 레이철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채소 마누라> 는 여성을 식물화했다.
밭에다 식물을 심으면 여자로 자라게 된다. 채소 신부, 채소 처녀가 있지만 농부는 채소 마누라를 심는다.
점점 여자로 자라나는 채소 마누라를 쳐다보는 농부의 끈적한 시선. 다 자란 채소 마누라를 거칠게 대하는 농부의 모습에 분노 게이지가 올라간다.
그리고. 팻 머피는 위대한 반전을 심어놨다.
채소 마누라는 농부가 자기에게 한 짓을 되갚아 준다.
농부가 묻힌 그 땅에서는 무엇이 자랄까?
시간여행자에게 받은 오렌지.
그녀가 시간여행자임을 알아챈 순간 그녀에게 가진 호감은 질투로 바뀐다.
나도 시간여행자가 되고 싶다. 나도 데려가 달라고 하지만 그들의 시도는 실패했다.
전염병이 그들의 아파트를 덮치고 그도 병이 든다.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서 깨어날 때마다 눈앞에 그녀가 있다.
조금씩 늙어가는 그녀의 모습. 시간 여행의 대가일까?
두 사람은 전염병이 창궐하기 전의 오렌지 농장으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을까?
나의 시간은 끝난다. 공룡과 인간들, 우리의 시대는 끝난다.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다. 새로운 유형의 사랑이. 나는 미래를 꿈꾸고, 금속 집게발의 달각거리는 소리가 나의 꿈을 채운다.
핵폭탄이 터지고 마지막 남은 시간 동안 로봇을 만드는 케이티.
사랑할 줄 아는 의갈목 수컷과 암컷을 만들고 죽음을 기다리는 케이티.
그가 만든 그 로봇들은 인간이 멸한 세상에서 또 다른 생명체가 될 수 있을까?
과학의 시대는 끝났다.
20편의 이야기는 지루할 틈이 없다.
어떻게 매번 이렇게 생경하면서도 익숙한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걸까?
과학과 여성을 모티브 삼아 이 지지리도 어리석은 시대를 맘껏 놀려대는 팻 머피의 글들은 통쾌함과 동시에 불편함을
위기의식과 동시에 짜릿함을 절망과 함께 희망을 보여준다.
복합적인 감정을 계속 느낄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 앞에서 새로운 SF 소설의 실체를 보는 기분이다.
쓸데없이 거창하지 않아서 좋고
전혀 본 적 없는 세상인데 익숙해서 소름 돋고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는 방식으로 상대를 서술하고 있어서 놀랍다.
표제작 <사랑에 빠진 레이철>만 읽어도 팻 머피라는 작가에 대한 신뢰가 생긴다.
그 짧은 단편에 인간의 오만함과 남성들의 우월감을 드러내면서도 현명하게 빠져나가는 레이철의 선택을 통해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둔다.
시대를 앞서간 작가의 상상력에 책을 읽는 시간이 행복했다.
과학의 시대가 끝났듯 우월감으로 똘똘 뭉친 시대도 끝날 것이다.
그 뒤에는 온건한 평화가 깃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