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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꿈들 - 장소, 풍경, 자연과 우리의 관계에 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양미래 옮김 / 반비 / 2022년 11월
평점 :
우리가 체포 이상의 더 가혹한 대우를 받지 않은 이유는 돈 그리고 땅과 연관되어 있었다.
나에게 네바다의 이미지는 시체 저장소다.
해리 보슈에서 네바다는 연쇄살인마 '시인'의 시체 저장소였다.
사막의 건조함, 끝도 없이 넓은 광활함, 아무도 찾지 않는 곳.
그곳은 살인마들에게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한 최적의 조건이었다.
이런 네바다는 '눈처럼 새하얀'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미국과 영국은 네바다에서 핵실험을 했다.
40년간 한 달에 하나씩 핵폭탄 실험을 했다. 그러기 위해 그곳에 살고 있는 원주민의 땅을 빼앗았다.
그리고 민간인의 출입을 불허했다.
핵폭탄이 터지고, 버섯구름이 솟구치고, 땅은 신음했고, 구름이 퍼져 내려앉은 낙진은 바람 따라 날아갔다.
사람이 덜 사는 곳으로 바람이 불 때마다 폭탄을 터뜨렸다고 하니 아주 계산적이고 치밀한 은폐였다.
리베카 솔닛의 글이 사람들에게 자꾸 읽히는 이유는 자료들을 쌓아두고 방구석에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체험한 것들을 가지고 살아있는 글을 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글은 우리를 한곳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
네바다 핵 실험장을 이야기하면서도 솔닛은 그에 걸쳐진 수많은 가지들을 언급한다.
핵실험을 리허설로 표현한 것은 솔닛의 글이 어떻게 사람들의 뇌리에 박히게 되는지를 잘 표현한 말이다.
'안보'라는 탈을 쓰고 이루어진 모든 행동들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안보'의 탈을 쓴 '돈'이었다.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자행된 일들은 대다수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건 내 생활 반경과 상관이 없는 것이었으니까.
당장 내 눈앞에서 벌어지지 않는 이상 그것은 먼 곳의 일이고, 나에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들로 대부분 자신들의 권리와 의무를 대신한다.
핵실험 책임자들이 발표한 성명 내용을 믿는다면, 그들에게는 인간의 죽음을 초래하려는 의도가 없다. 내가 나방의 죽음을 의도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다만 그들이 다운윈더를 생각하는 정도 또한 내가 곤충을 생각하는 정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 광대한 우주에서 나방의 죽음이란 사소한 일인 듯하고, 시위(그날 아침 고속도로를 점령한 사람들의 힘)도 정부 권력에 맞서는 사소한 힘인 듯하다.
수년간 핵실험장을 찾은 내 행동이 군비경쟁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나는 지금도 모르고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냥 헛된 것만은 아니다. 내가 핵실험장을 찾은 것은 신념에 바탕을 둔 행위였고, 내가 한 일을 영영 정량화할수 없다 해도 아무튼 해보겠다는 결심의 소산이었다. 또 핵실험장을 찾은 행동이 나 자신에게 지대한 변화를 가져왔으므로 오로지 신념에 바탕을 둔 행위만은 아니었고, 나는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보답받았다.
솔닛의 글을 읽는 건 다큐멘터리를 보는 일이다.
영상을 보는 것처럼 그려지는 유려한 문장들은 생각의 연상작용처럼 이미지를 그려낸다.
네바다 핵실험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는 헨리 소로를 만나고 불꽃 속으로 사라지는 나방의 춤을 보고
카우보이 밥의 모습을 떠올리며 있는지도 몰랐던 쇼쇼니족의 역사를 그려본다.
이런 생각의 타래가 솔닛을 읽는 기쁨이 아닐까?
솔닛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읽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 모든 타래들을 잘 엮어 '글'이라는 직조물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얻은 것이 바로 솔닛의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보답받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직접 발로 뛰어 작성한 기사가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듯이
직접 경험에서 우러나온 생각의 깊이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무관심에서 관심으로 돌려놓는다.
리베카 솔닛을 통해 바라본 네바다 핵실험장과 바위에 계란 던지듯 그곳을 찾아 자신들의 신념대로 행동한 수많은 사람들의 행동이 어딘가에서 그 보답을 받으리라 생각한다.
오랜 시간을 걸쳐서 나 같은 사람의 마음속에도 '사실'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안겨준 리베캇 솔닛.
이 솔직하고 옳은 글이 더 많은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워주었으면 좋겠다.
더 이상 망칠 수 없을 정도로 병들어 가는 지구, 그곳의 유한한 '장소'들이 무지와 욕심들에 사용당하지 않고
대다수 선량한 인간들과 보호받으며 살아야 하는 많은 생명체들에게 되돌아가기를 바란다.
전쟁과 발견이 서로 교차하지 않는다는 사실, 버넬이 자신이 가진 인류애를 거주민이 아닌 경치를 위해 몽땅 발휘했다는 사실, 요세미티에 관한 대중의 견해도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 우리가 가진 풍경에 관한 견해와 역사에 관한 견해의 간극속에 수많은 잃어버린 이야기와 파괴된 문화와 지워진 이름이 들어차 있다는 사실은 과연 무얼 의미하는 걸까?
2부 요세미티 국립공원은 먼저 아름다운 풍광을 그리게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행되었던 만행을 담아 낸다.
내게 인디언은 벌거벗고 다니며 사람의 가죽을 벗겨내는 잔인하고 야만적인 종족으로 각인되었다.
그 이유는 어릴때 보았던 서부영화속의 인디언들 때문이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자기들의 만행을 어떻게 포장해왔는지는 서부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게 야만적이고 무서운 종족이었던 인디언들이 얼마나 자연에 동화되어 선하게 살아가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면서 그들을 무참하게 살육했던 백인들의 역사가 자신들의 고난으로 포장되어 있는 것에 혐오감을 느끼게 되었다.
남의 땅을 짓밟고, 모든 걸 다 차지하고서 원래 그 땅의 주인들을 한 곳에 몰아 넣어 자치구와 보존구역안에서 나오지 못하게 만든 백인들의 찬란하도록 잔인한 역사.
나는 솔닛이 그러한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했다.
솔닛 역시 그러한 백인중에 한 명 이니까.
경제 활동(주로 금 채굴)에 필요한 땅을 개척하고 있던 그들 입장에서 걸림돌이 되는 원주민들은, 말하자면 금이 가득 찬 화석 강바닥에서 흙을 들어내듯 더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치워버려야 하는 존재였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요세미티의 이면에는 금을 캐기 위해 자행됐던 일련의 일들에서 자연을 보호하기 위한 구제책이었다.
대자연의 일부분을 국립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보호하며 그 풍광을 널리 알리는 대신 나머지 자연들은 파헤치고, 긁어 모으고, 파괴해버렸다. 그것에 대한 속죄가 국립공원이었다.
요세미티라는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백인이 붙이 이름이다. 이 요세미티라는 이름에는 '살인자'라는 뜻이 담겨 있다.
정복자들이 알고 있었던 '회색곰' 은 "방종하고 약탈을 일삼은 성격" 에서 유래되었다. 원주민들에게 '회색곰'은 이런 뜻이었다
그리고 더 정확한 뜻은 "살인자" 였다.
본인들이 정한 이름의 정확한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채 붙여버린 이름 요세미티.
그러나 그 어디에도 요세미티의 진정한 뜻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회색곰'이라는 원주민어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어떤 장소를 알아간다는 것은 친구나 연인을 알아가듯 그 장소와 친밀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장소를 더 잘 알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새로운 방식으로 참신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흘러도 사그라들지 않는 심오하고도 심란한 방식으로 낯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에서 인간은 제외되어야 할까?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진정 청정한 자연인걸까?
인간의 인위적인 행동이 자연을 자연그대로 두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수 많은 동물들과 식물들이 자연을 이루는 하나의 개체라면 동물에 속한 인간도 자연의 개체일 것이다.
자연과 공존하는 법을 가장 잘 알았던 원주민 인디언들.
만약 이주민들이 인디언들과 공존했다면 미국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보호'라는 이름하에 관리되고 있는 자연에도 인간의 손길이 필요하다.
그것은 관상용의 손길이 아니라 자연친화적 손길을 말한다. 그것을 꿰뚫어 보는 솔닛의 시선이 그래서 반갑다.
네바다 핵실험장과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통해 솔닛은 세상을 움직이는 작은 발걸음을 이야기했다.
소소해보이는 발걸음들, 신념을 가진 발걸음들, 의지를 가진 발걸음들이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열심히 한 결과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서서히 많은 것들을 제자리로 돌려 놓으려 하고 있다. 수 많은 무심한 눈들의 촛점을 관심으로 돌리고, 듣지 않는 귀들을 열리게 하고, 침묵하는 입들을 열게 만든다.
<야만의 꿈들>은 솔닛의 글쓰기 출발점이다.
20년 전에 쓰인 이 글은 시간의 차이를 느낄 수 없고, 오히려 더 신선하게 다가온다.
불공정과 불합리를 향한 솔닛의 글은 수 많은 이야기의 가지를 통해 독자들에게 더 친근하고 더 뿌리 깊게 각인된다.
나 역시 나와는 전혀 상관없을 거 같았던 네바다 핵실험장과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이야기를 읽으며 결국 나 역시도 이곳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바다 핵실험장에서 뻗어나간 구름연기가 우리에게 비가 되어 내렸을 수도 있고,
요세미티 정복의 역사가 우리가 치뤄야 했던 고난의 역사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그 역사적 전쟁에서 이겼고, 우리의 문화를 지켜가고 있지만 수 많은 잔재들도 함께 지고 가고 있다.
내가 가졌던 인디언 원주민들에 대한 편견들 역시 요세미티가 가진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이렇게 생각하니 세상 모든 것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무엇 하나도 사소한 것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나비효과처럼
우리는 서로의 날개짓에 영향을 받고 살고 있다.
그러니 나와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외면하고, 관심 없었던 것들에 조금씩 시간을 들여 눈을 돌리고, 귀를 기울이고, 입을 열어야겠다.
솔닛이 솔닛한 <야만의 꿈들>
내가 알지 못한 세상이, 자연이, 장소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라는 생각을 가진 분들에게 읽어 보시라고 추천하고 싶다.
내가 알지 못했다고 해서 이 세상에 나와 상관없는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