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다크 버네사
케이트 엘리자베스 러셀 지음,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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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운명이겠지." 그는 말했다. "마침내 영혼의 짝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열다섯 살이라니."

 

 

촘촘하다.

그가 버네사에게 다가가는 모든 상황이.

한 올 한 올 뿜어내는 거미줄같이.

얼마나 많은 버네사들이 그 거미줄에 걸려들었을까?

 

버네사는 호텔 프런트에서 일한다.

서른이 넘은 나이지만 그녀의 인생은 온통 스트레인의 거미줄에 매여 있다.

지금 그는 어린 학생이 고발에 학교로부터 심사를 받는 중이다.

버네사는 그 학생의 페이스북을 들여다보는 걸 멈출 수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퍼나르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글에 좋아요를 누르는지가 버네사의 최대 관심사다. 그리고 스트레인에게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해서 그의 상태를 알아보는 것에 그녀의 하루를 다 쓴다.

그럼에도 그녀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는 알려 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스트레인과 있었던 일은 모두 아무 일도 아니었으니까...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과 <마이 다크 버네사>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사람은 견디다 못해 세상을 버렸고, 한 사람은 자신을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한 사람은 용기를 내어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썼지만 대중은 그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한 사람은 누군가 용기를 내어 그를 박살 내주기를 바라지만 자신은 나서지 않는다.

자기는 다른 경우니까...





어린 소녀에게 마수를 뻗치는 자는 그 소녀에게 힘을 준다.

마치 모든 게 그 아이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고, 그 아이가 원한 것이고, 그 아이가 주도권을 가진 것처럼..

열다섯의 아이는 스스로 롤리타가 되어 자신이 그를 조정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자신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좌우된다고 생각한다.

영리하지만 외로웠던 아이에게 그의 관심은 스스로를 어른처럼 여기게 만든다.

교묘하고 촘촘하게 스트레인은 버네사를 가뒀다. 열다섯이라는 나이 안에.

 

버네사를 만나는 동안 내내 조마조마했다.

버네사가 수렁의 늪으로 거침없이 들어가 서서히 빠져드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화가 났다.

그래서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고, 이상한 소문들에 대해서 들었으면서도 누구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것에 분노했다.

 

진실은 숨을 곳을 주지 않는다.

 

 

서른이 넘었지만 버네사는 스트레인 때문에 그 나이를 살지 못한다.

여전히 그와 연결되어 있고, 그로 인해 다른 관계들조차 엉망이 된다.

상담을 받고 있지만 그건 아버지의 죽음 때문이지 그녀와 스트레인의 관계 때문은 아니다.

사랑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것을 인정하기는 싫다. 그것은 그녀 전체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성적인 대상이 된다는 것.

30년 차이 나는 사람에게서 남자를 느낀다는 것.

스스로가 아닌 그가 유도하는 바대로 나아가는 버네사는 자신의 모든 것을 스트레인에게 빼앗긴다.

문학을 사랑했던 소녀는 자신만의 시를 썼지만 스트레인에게 매인 소녀는 그에게 보여주기 위한 시를 쓴다.

자신이 얼마나 어른스러운지를 증명하는 시간들...

 

스트레인 같은 인간은 사라져야 하지만

그는 또 면죄부를 받는다.

하버드를 나온 독신남은 험버트가 되어 롤리타들을 만들어 내지만 그 누구도 그의 죄를 묻지 않는다.

이것이 현실이다.

 

버네사의 이야기는 피해자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들에서 그들이 무엇을 보는지

자신의 삶이 무너졌지만 그것을 다르게 인지하면서 스스로를 그 틀에 놓아두어야만 하는 상황이 왜 생기는지를 보여준다.

 

아름답고

영민하고

밝은 삶으로 충만했을 한 소녀의 인생이

거미줄에 걸려서 전시되고 있었다.

 

모두 거미줄을 바라보지만 피할 뿐

거기 매달려 있는 거미의 먹이들에겐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았다..

가끔은 영롱한 이슬을 머금은 거미줄에서 색다른 아름다움을 볼 뿐

그 덫에 걸려 꼼짝하지 못하는 슬픈 영혼들을 보지 못한다..

 

세상의 모든 버네사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당신 인생을 찾아야 한다. 이제라도...

 

스트레인 같은 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사회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어떤 사회적 위치와 권력을 가졌다고 해도.

롤리타, 팡쓰치, 버네사는 모두 우리 주변의 소녀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고통을 모른 척하는 것은 미개한 사회이고 무지한 사회다.

 

작가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쓴 글들은 그만한 가치를 얻었다.

읽다 보면 우리는 모두 버네사가 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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