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 코펜하겐 삼부작 제1권 암실문고
토베 디틀레우센 지음, 서제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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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나는 내 안에 흘러 다니는 모든 말들을 글로 쓸 것이다. 언젠가 다른 사람들은 한 권의 책이 되어 나온 그 말들을 읽을 테고, 결국 여자가 시인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덴마크 작가의 글을 몇 권 읽었는데 모두 장르소설 분야였다.

건조함에 살짝 가미된 유머와 그 안에 버무려진 사회성 짙은 이야기에 묘한 매력을 느꼈었다.

덴마크 에세이는 처음인데 작가 사후 50년이 지나서야 독자들의 눈길을 받은 글들이다.

<코펜하겐 삼부작> 중 <어린 시절>은 작가의 어린 시절이 담긴 글이다.

토베의 글을 읽으며 박완서 선생님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었던 때가 떠올랐다.

박완서 님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엔 그분의 어린 시절이 담겼는데 도대체 어떻게 어린 시절을 그렇게 세세하게 묘사할 수 있는지, 그때의 감정을 어떻게 놓치지 않고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는지가 감탄스러웠다.

토베의 글이 가진 감수성은 담백하면서도 날카로워서 아주 작은 소녀의 모습 위로 굳건한 어른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어린 시절은 관(棺)처럼 좁고 길어서, 누구도 혼자 힘으로는 거기서 나갈 수 없다. 그것은 늘 그 자리에 있고, 모두가 그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시인이 되고 싶다는 소녀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바보 같은 소리! 여자는 시인이 될 수 없어!"

어느 나라에나, 어느 시대에나 같은 생각들이 공유되었나 보다.

그러나 소녀는 시인이 되었다. 소녀에 마음에 넘쳐나던 많은 이야기들이 결국 세상 밖으로 나와 사람들 눈에 띄기 시작했으니까.

 




어린 시절은 캄캄한, 지하실에 갇힌 채 잊혀 버린 작은 동물처럼 언제나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다.

 

 

상황과 시간과 사람과 감정을 표현하는 글들이 독특하게 생소하다.

글을 따라 낯선 도시를 그리고, 낯선 사람들을 그리고, 낯선 표현들을 음미한다.

그 시대에 살아 보지 않았고, 그 도시를 알지 못해도 토베의 <어린 시절>에 담긴 사람들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우리와 다를 거 같지만 같은 사람들의 모습이...

 

이스테드가데는 내 어린 시절의 거리다. 그곳의 리듬은 언제나 내 핏속에서 세차게 고동칠 것이고, 그곳의 목소리는 언제나 내게 닿을 것이며, 우리가 서로에게 진실할 것을 맹세했던 저 먼 옛날처럼 언제나 그대로일 것이다.

 

 

나에게도 이스테드가데가 있었을 것이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동네와 골목골목들에 담겼던 추억들이 글을 읽는 동안 스쳐간다.

토베처럼 생생하게 묘사할 수 없는 그 시절이 내 안에서 요동친다.

토베의 남다름은 언제나 가슴속에 언젠가 쏟아 낼 말들을 품고 살았다는 것이다.

 

내 어린 시절의 마지막 봄은 춥고 바람이 세게 분다. 먼지 같은 맛이 나고, 고통스러운 출발과 변화의 냄새가 난다.

 

 

열네 살 처음으로 찾아간 출판사에서 토베의 "관능적인 시"들은 거절을 당한다.

조금 더 커서 오라는 편집자의 말을 들은 토베는 실망을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다시 시 노트에 글을 쓴다. 글을 쓸 때만이 그녀의 슬픔과 갈망을 무디게 만들어 주니까.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 진학은 못하고 토베는 오페어가 된다.

2년 뒤 다시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기 위해서 잠시 쉬어가는 중이라는 걸 그녀 외엔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어머니의 가슴에서 살해당한 소녀는 빛을 내기 시작한다...

 

진중한 글들이 누군가의 어린 시절을 그려낸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살아 있었던 이야기다.

진정한 에세이스트의 <어린 시절>은 독특한 풍미를 가진 트러플 같다.

모든 재료들의 풍미를 더욱 살려주는 마법의 가루처럼 토베의 글은 새로운 감각으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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