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 윌북 클래식 첫사랑 컬렉션
제인 오스틴 지음, 송은주 옮김 / 윌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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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일곱 살의 앤은 열아홉 살 때와는 생각이 크게 달라졌다. 레이디 러셀을 원망하지도, 그의 말대로 따른 자신을 탓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비슷한 처지의 젊은이가 자신에게 조언을 구한다면, 불확실한 미래의 행복을 위해 당장 눈앞의 불행을 감수하라는 말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윌북의 첫사랑 컬렉션에 담긴 4권의 책 중에 내가 선택한 책은 제인 오스틴의 <설득>이다.

영국 작가의 글은 미국 작가의 글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제인 오스틴은 신랄하면서도 통통 튀고, 통통 튀는 거 같으면서도 진중하다.

그의 작품들에는 그 시대의 허영이 살아 숨 쉬고, 그 시대 청춘의 고뇌가 피어오르고 그 시대 속물들의 마음이 까발려진다.

어쩜 영국 귀족들의 허세와 허영 아래 숨겨진 찌질함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가가 제인 오스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품격을 잃지 않는 글들을 읽다 보면 진정한 "귀족적"이라는 뉘앙스가 무엇인지를 느끼게 한다.

 

설득의 앞 부분에 나오는 전형적인 귀족 엘리엇 경이 가장 즐겨 보는 책은 바로 준 남작 명부다.

아내가 죽고 세 딸을 키우는 엘리엇 경은 자신의 멋진 외모와 지위만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내가 죽은 이후 맏딸 엘리자베스가 안주인 노릇을 잘 해나가고 있지만 부모로부터 멋진 외모를 물려받았을 뿐 씀씀이 큰 나이 먹은 노처녀로 자랐다.

막내는 지위는 낮지만 걱정 없는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

그의 둘째 딸 앤은 미모도 보잘것없이 나이만 먹은 노처녀였다.

그나마 앤의 진가를 알아보는 이는 엄마의 친구 레이디 러셀뿐이었다.

하지만 그 레이디 러셀로 인해 앤은 꽃다운 나이를 그냥 흘려보내게 되었다.

 

영국 드라마 <다운트 애비>를 보면 아들이 없는 크롤리 가문의 영지와 재산은 딸들에게 가 아닌 친척 남자에게 남겨지게 된다.

그래서 크롤리의 큰딸 메리가 유산 상속자와 결혼을 하게 된다.

<설득>에도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귀족의 이름과 가문의 재산이 딸들에게는 물려줄 수 없다는 사실이 웃프게 느껴진다.

아마도 그쪽은 결혼과 동시에 "성"이 바뀌기 때문인 거 같다.

엘리엇 경은 자신의 영지와 이름을 물려받을 친척을 찾지만 왠지 엘리자베스와는 격이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엔 그쪽은 이 제의에 별 흥미가 없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엘리엇 경의 '멋대로 생각'때문에 엘리자베스마저 혼기를 놓치고 만다.

엘리자베스와 앤은 올바른(?) 짝을 만나서 가정을 이룰 수 있을까?

지금이라면 결혼에 목매지 말고 혼자 잘 살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그 시대는 결혼 안 한 귀족 여자는 불명예 그 자체이니까 어쩔 수 없이 좋은 남자를 만나게 되기를 응원하게 된다.

 




오만과 편견에서도 그랬지만

설득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두 마음은 엇갈리고, 상대를 잊지 못하고, 돌아돌아 자신들의 자리를 찾게 되는 과정.

그 과정에 쓸데없는 오지라퍼들의 입김이 지름길을 놔두고 멀리 돌아가는 길을 알려준다.

어쩜 그랬기에 더 간절하게 서로를 알아봤는지도 모르겠지만.

 

8년 반의 긴 시간.

남자는 당당한 어른이 되어 성공한 모습으로 돌아왔고

8년 반의 긴 시간.

여자는 시들어가는 꽃처럼 여겨지며 의무감에 짝을 찾는 모습으로 남아있다.

누군가의 <설득>이 그리 설득적이지 못했다는 상황을 보여준다.

 

제인 오스틴은

남의 일에 감놔라 배놔라 할 거면 좀 더 신중해져야 한다는 말이 하고 싶었나 보다.

사람을 가진 것으로 만 보지 말고 그가 앞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을 보라고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결혼은 서로의 가치를 지위와 가진 것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더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먼 시대, 옛날이야기 같지만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또 다른 앤과 웬트워스가 누군가의 <설득>에 의해서 헤어지는 결심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결혼의 불행은 모두가 마땅히 찾아야 하는 '사랑'의 결여에서 생기는 것이다.

'사랑'이 아닌 '돈'과 '권력'이 수많은 청춘들의 가슴을 짓밟아 놓고 그들의 마음을 얼음으로 바꿔 놓는다.

그 얼음 가슴들 사이에서 태어난 무수한 얼음조각들이 이 세상을 얼음왕국으로 만들어가 가고 있는 건 아닌지...

 

21세기에 읽는 제인 오스틴의 <설득>

넷플릭스에서 영화도 개봉된다고 해서 원작부터 읽어 봤다.

원작을 능가하는 영화는 없지만 <설득>이 모든 이들의 마음을 잘 <설득>했으면 좋겠다.

 

나 역시 쓸데없는 오지라퍼의 습성을 조금씩 버리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그냥 나는 나만 잘하면 되니까.

누군가를 <설득>하기 보다 나 자신을 우선 <설득>하자.

 

새 시대 새로운 번역으로 제인 오스틴을 다시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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