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기억들의 방 - 우리 내면을 완성하는 기억과 뇌과학의 세계
베로니카 오킨 지음, 김병화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신병적' 감각이든 '진짜' 감각이든, 외부 세계의 무언가에 의해 자극되었든 아니면 별다른 이유 없이 또는 외부적 감각 없이 두뇌 혼자서 발화하여 생겼든, 모든 감각은 진짜로 경험된다.

 

세계적인 신경학자 베로니카 오킨의 <오래된 기억들의 방>은 그녀가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기억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면서 쓴 글이다.

환자들의 사례를 통해서 자신이 기존에 배우고 익혔던 것들에서 탈피 '진짜'를 연구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사실 다양한 사례들을 읽으며 기억이라는 게 완벽한 것은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 '가짜'라는 걸 알지만 진짜처럼 느껴지는 기억들이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사실은 처음 알게 되었다.

 

이 책에 담긴 사례들은 드라마나 소설을 통해서 마주친 적 있는 병들이거나 처음 알게 된 증상들도 있다.

인간은 감각 경험의 이해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는 걸 이 책이 알려준다.

뇌 자체가 기억에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를 알려주지만 모두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사례들을 통해서 세워진 이론이라서 좀 더 이해하는 바가 다른 책들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든다.

 

트라우마가 기억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가 제일 흥미로웠는데 체계적이지 못한 기억 네트워크가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나는 어릴 때 바다에 빠진 경험이 있다.

엄마, 아빠가 보는 앞에서 그대로 바다로 빠져서 인지 엄마 아빠는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물에 떠있기만 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인데 나는 물속으로 잠겨 들어가면서 엄마랑 아빠의 몸이 움직이지 않는 걸 보았다.

"아무도 날 구해주지 않아!" 내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9살 때의 기억은 그 이후 허리 이하의 물에만 나를 가두었다.

그날 아빠의 친구분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다음날 나는 수영은 못하고 튜브만 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튜브는 파도에 쓸려서 점점 바닷가로 밀려갔다.

어제 물에 빠졌던 기억이 남은 나는 내가 바닷가로 밀려간다는 생각은 못 하고 물속에서 무언가가 나를 잡아가려 한다는 생각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지금도 눈에 선한 장면인데 저 앞에서 엄마는 동생들을 돌보며 나한테 소리쳤다.

"일어나! 그냥 일어나면 돼!"

내 바로 앞에 있는 아줌마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그 아줌마의 발목쯤에 물이 차 있었던 게 눈에 보였지만 나는 내 엉덩이가 바닷가에 닿은 거라는 생각을 못 했다.

튜브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울고 있는 나를 보다 못한 엄마가 다가와서 튜브에서 나를 들어 올려 내려놓았다.

바닷물은 내 발바닥을 겨우 간지럽히고 있었다.

 

엄마의 기억은 내가 물을 무서워하는 아이로 남았고

내 기억은 내가 죽든 말든 아무도 상관하지 않음으로 남았다.

나는 수영을 배우라는 사람들의 말이 무섭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나는 수영을 배우고 싶지 않다.

물은 내게 영원히 무서운 존재니까.

 

우리의 기억에서 장소는 소중하게 다루어진다. 그래서 무언가를 기억해 낼 때 언제나 장소를 먼저 떠올린다.

어떤 중요한 일을 떠올릴 때 '그때 내가 어디에 있었지?'라는 그 기억을 되새기기에 좋은 출발점이다.

 

살아 있는 두뇌인 신경의 끊임없이 징징대는 소리에서 기억들이 만들어진다.

 

 

나는 돌잡이 기억을 아직 가지고 있다.

내가 그때 얘기를 하면 모두가 부모님에게 얘기를 들었거나, 비디오를 봤을 거라고 말하는데

그때의 기억은 영화 필름처럼 내게 각인되어 있다. 마치 나 자신이 아니라 내 영혼이 육체의 행동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느낌처럼.

그리고 꽤 좋은 기억력을 가졌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기억은 흐지부지되었다.

그것은 나쁜 기억을 지워버리려는 뇌의 속성 때문인 거 같다.

 

누구나 인생의 블랙홀 같은 시점이 있고, 그 기간 우리의 뇌는 기억을 흩트려놓는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이나, 시간들은 그렇게 통째로 사라지거나, 흐려지거나, 모호해진다.

그래서 기억하기보다는 잊기를 선택하고 그렇게 좋은 기억력은 점점 좋은 잊힘으로 바뀌어가는 거 같다.

 

책을 읽으며 나 자신을 돌아봤던 시간이었다.

내가 가진 트라우마와 기억들을 책에 담긴 사례와 비교해 보며 스스로 정신과 의사 노릇을 해봤다.

쉽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내가 이해한 만큼 유익한 이야기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