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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방 - 나를 기다리는 미술
이은화 지음 / 아트북스 / 2022년 4월
평점 :
예술이 세상을 바꾸거나 구원하지는 못하겠지만 내 삶을 바꾸거나 더 풍요롭게 만들 수는 있다고 믿는다.
미술관처럼 꾸며진 5개의 방은 주제가 있다.
발상, 행복, 관계, 욕망, 성찰의 이름이 붙은 방에 12점의 그림이 걸려있다.
익숙한 그림도 있고, 처음 보는 그림도 있다.
<발상의 방> : 예술의 관념을 깨기 위해 싸우고 도전했던 미술가
세계 최초의 추상화가는 칸딘스키가 아니었다.
힐마 아프 클린트.
평생 은둔하며 그림을 그렸지만 살아생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내 작품을 내가 죽은 뒤 20년 동안 봉인하거라."
역사에서 '최초'는 중요하다. 최초로 이룬 자들만이 기록되기 때문이다. 아프 클린트가 칸딘스키보다 5년 앞서 추상화를 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서양미술사는 새로 쓰여야 할 것 같다. 최초의 추상화가는 칸딘스키가 아닌 아프 클린트였으며, 그림을 이젤이 아닌 바닥에 놓고 그린 혁신적 시도 역시 잭슨 폴록 보다 최소 40년은 앞섰다고.
힐마 아프 클린트가 역사에 기록되기를 바란다.
푸른 하늘에 대고 사인을 한 이브 클랭.
그의 블루는 명작이 되었다.
캔버스에 파란색을 칠한 것뿐이지만.
나는 그 파란색 앞에서 오만가지를 느껴야 할 거 같은 강박을 느낀다.
이것 역시 관람의 발상 전환인 걸까?
<행복의 방> : 일상을 새롭게 인식하게 만드는 작가
포장의 달인이자 예술의 달인인 환경설치미술가 크리스토 자바체프와 잔클로드.
두 사람의 프로젝트는 인상적이다. 역사적 장소를 포장하는 사람들이라니.
그들의 아이디어가 실현되는 과정 자체가 바로 사람들에게 희망과 행복을 주는 거 같다.
전쟁 속에서도 아이들은 천진난만하다.
아이들의 모습을 무심히 보고 있으면 고달픈 세상사를 잊을 수 있을 거 같다.
핀란드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해변에서 노는 소년들>은 아련하기만 하다.
고야는 세상을 풍자한 그림들을 약국에서 팔았다.
그것도 자신이 살고 있는 집 1층에 있는 약국이다.
자신의 판화가 어떤 파장과 반향을 일으킬지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관계의 방> : 인간관계에서 파생하는 다양한 감정
남자친구에게 받은 이별 편지를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보내 분석을 의뢰한 소피.
그 결과물을 전시해서 모든 사람들과 이별의 슬픔을 나눴던 소피.
소피도 대단하지만 자신들의 개성에 맞게 편지를 해석한 사람들도 대단하다.
반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은 볼 때마다 결혼식이 아닌 다른 것이 떠오른다.
마치 불멸의 존재에게 자신을 내맡기는 듯한 느낌이 든다.
존재하지 않는 존재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불편함과 공포가 보인다.
결혼이란 그런 것이니까.
결혼 전에 존재했던 사람은 결혼 후에는 존재하지 않는 법.
그 존재에게 나를 다 맡겨 버려야 하는 순간의 공포를 아주 잘 그려낸 작품인 거 같다.
물론 고야가 내 말을 듣는다면 기암을 하고 쓰러질지도 모르겠지만.
<욕망의 방> : 권력과 욕망
피핑 톰은 엿보기 좋아하는 사람이나 관음증 환자를 뜻한다.
이 말은 영국의 고다이바 부인의 전설에서 유래했다.
남편의 가혹한 세금 징수로 인해 고통받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알몸으로 마을을 한 바퀴 돌았던 고다이바 부인.
모두가 부인의 희생을 고맙게 그녀가 마을을 도는 동안 집안에서 창문을 꼭 닫고 있었다.
그러나 재단사 톰은 궁금증을 참지 못해 살짝 엿보았고, 그 후로 장님이 되었거나,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설이 있다.
결혼 3년 만에 갖게 된 실레.
행복한 생활은 잠시였고, 이후로 찾아온 스페인 독감으로 아내와 뱃속의 아이를 한꺼번에 잃는다.
그리고 3일 후 실레 역시 독감으로 세상을 떠났다.
<성찰의 방> : 개인과 사회의 기억과 성찰
개인과 사회가 동시에 성찰하게 되는 가장 큰일은 전쟁일 뿐이다.
이 책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된 <한국인 어머니> 라는 그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건네져 온다.
폴란드 작가의 이 그림에서 뒤쪽에 그려진 연기는 미군이 폭격을 가한 것으로 해석된다.
공산국가의 해석은 미군의 폭격이지만 나의 해석은 그 반대편의 폭격이라고 생각된다.
그림도 결국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것이다.
60점의 그림들에 담긴 이야기.
이 책에 담긴 이은화 저자의 글은 보충 설명 정도로 새기고
스스로 그림에 담긴 느낌과 해석을 해본다면 어떨까?
저자의 글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그림들 앞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것 역시 스스로를 성찰하는 방법이기도 할 테니까.
그럼에도.
짧은 글로 그림 속에 담긴 감정들을 돌아보는 시간들이 좋았다.
주제별로 묶고 짧은 그림에 대한 정보만은 주어서 독자들에게 더 많은 사색을 하게 하는 책.
<그림의 방>은 내게 그런 책이었다.
마음이 복잡할 때 아무 곳이나 펼쳐 읽기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