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
렌조 미키히코 지음, 양윤옥 옮김 / 모모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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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 자신을 지키고 싶었다.

 

하얀 빛처럼 여겨지는 뜨거운 햇빛이 쏟아지는 7월 어느 날.

능소화가 피어 있는 마당에서 나오코의 시체가 발견된다.

네 살 아이 나오코는 왜 이모네 집 마당에서 죽음으로 발견됐을까?

 

 

이 집은 배신과 보복의 전쟁터였다. 승패가 결정되지 않은 채 영원한 싸움을 반복하는 전쟁터...

 

 

한 아이의 죽음 앞에서 치매 노인과 그 아이의 이모, 이모부, 사촌 언니, 아이의 부모와 엄마의 불륜남이 차례로 자신들의 죄를 고백한다.

반전은 반전을 몰고 오고, 각자의 인물들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인간의 마음 밑바닥에 깔려 있는 본능은 그렇게 이타적이지 않다.

 

 

한 아이의 죽음 앞에서 삐져 나오는 비밀과 은밀한 살의들은 한 집안의 대를 이은 불륜의 씨앗으로부터 파생되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어느 하나 냉정맞지 않은 이가 없다.

아이들 마저도 냉정하다. 감정적인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자짓 건조하게 보이지만 그만큼 서늘하다.

게다가 렌조 미키히코의 문장들은 왜이리도 생각을 후벼파는지 모르겠다.

자기 죄를 고백하는 이들에게 모두 동조하고 싶게 만드는 타당한 문장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다.

 

 

 

우리 가족과 그 집안을 직접 이어주는 끈은 사토코 씨와 유키코가 자매간이라는 것뿐이었지만, 나는 우리 집이 그 집안에서 파생된 새끼 가족처럼 느껴지곤 했습니다. 우리 결혼 생활의 불행의 이유가 원래 그 집안에 있었던 세균 같은 유전자를 물려받은 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모두 입다물고 살고 있었지만 모두 힘들게 삶을 연명하고 있었다.

모두 행복한 듯 무탈하게 살고 있었지만 모두가 불행속에 빠져 있었다.

각자가 비밀을 간직한채로 서로와 마주치며 비극을 키워갔다.

서로의 것을 빼앗으면서도 서로의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했던 사람들이었다.

 

 

때론 잔혹하고

때론 교활하고

때론 무심하고

때론 헛갈리게 하는 이야기는 모노 드라마를 지켜 보는 거 같다.

혼자서 독백을 하면서 자신의 죄와 타인의 죄를 말하는 배우들처럼 모두가 카메라 앞에서 자기들이 외워 온 대본을 말하는 거 같다.

마치 독자들을 앞에서 오디션을 보는 것 처럼.

 

 

 

실제로 내 몸은 모피가 타는 듯한 냄새를 풍겨서 나는 죄라는 건 이런 냄새가 나는 것이구나, 하고 나 스스로도 그 악취에 얼굴을 찡그렸던 것이 기억납니다.

 

 

치매에 걸린 노인은 며느리와 며느리의 동생을 헛갈려 하고

나오코와 전쟁통에 섬에서 자신이 죽인 소녀를 구분하지 못한다.

엄마 유키코에게 나오코는 자신의 삶에 방해꾼일 뿐이었다.

아빠 다케히코는 나오코가 자기 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모 사토코는 자신의 딸 가요보다 나오코가 사람들에게 이쁨 받는 것이 보기 싫었다.

이모부 류스케는 무시할 수 없는 자신의 죄를 떠올리게 하는 나오코가 부담스러웠다.

가요는 사람들의 관심을 독차지 하는 나오코가 미웠다.

그랬다. 다들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다였을까?

 

 

그건 질투였습니다.

 

 

인간이 살의를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질투에 있지 않을까?

이 모든일은 어른들의 질투심 때문에 벌어졌지만 그 죄를 감당해야 했던 건 네 살 짜리 나오코였다.

이 묘한 심리극을 보고 있자면 다 범인 같고, 또 아무도 범인이 아닌 거 같다.

 

 

 

"괜찮아, 그렇게 해도. 잘했어..."

 

 

치매 노인의 기억속에서 되풀이 되는 이 말은 인물들이 독자들에게 하는 말 같다.

이 이야기를 어떤식으로 해석해도 괜찮다고. 당신이 어떤 마음이 들던 그렇게 해도 된다고.

 

 

그들 모두가 공범이었다.

각자의 죄를 덜어내기 위해 하나의 원죄를 만들어냈을 뿐이었다.

 

 

렌조 미키히코를 각인하게 되는 작품이었다.

마치 마이클 코넬리의 <시인>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건조한듯 습한 문장들의 파편이 곳곳에서 촉수를 뻗어내고 있었다.

끈끈한 짓물을 잔뜩 묻힌 그 촉수들이 생각을 휘어잡아서 마비시키는 느낌.

그래서 범인을 앞에 두고도 내 머릿속엔 그저 "괜찮아"라는 망령의 속삭임만이 남는다.

 

 

전혀 괜찮지 않은 이야기를 괜찮게 써버리는 필력에 매료된 이야기.

그 강렬한 흰 빛에 눈이 멀어버리는.

백광은 그런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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