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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전트 러너
존 르 카레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8월
평점 :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규정해 주면서, 아빠는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 본 적 있어?
47살.
은퇴를 앞둔 스파이 내트.
첩보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은퇴해서 나머지 여생을 즐기느냐,
아니면 언저리라도 좋으니 사무직으로라도 업계에 계속 남느냐 두 가지 선택지에 놓인 그는 오랜 시간 숨겨온 자신의 직업에 대해 딸에게 고백한다. 은퇴자의 혜택이기도 하다.
스파이 하면 007이 떠오르고 연상작용에 따라 멋진 액션들과 최첨단 장비들, 멋진 여자들과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떠오른다.
게다가 같은 MI6 소속 아닌가!
브렉시트로 유럽 연합에서 탈퇴한 영국은 대영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리라는 노땅들의 환상 앞에서 갑자기 여지껏 누리고 있던 삶의 혜택을 한꺼번에 빼앗기고 높은 실업률과 함께 서너 배로 뛴 물가를 감당해야 하는 젊은 세대들의 갈등이 해소되지 않은 채로 잠재해 있다. 게다가 트럼프라는 카드는 여기저기서 경찰이 아닌 깡패 놀음을 하고 있는 상황.
이런 사회적인 문제 앞에서 은퇴를 앞둔 스파이의 남은 생명은 꺼져가는 촛불과도 같다.
가뜩이나 처진 어깨가 더 무거워지는 내트에게 유일한 취미는 배드민턴.
클럽 챔피언의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는 그에게 어느 날 생판 모르는 젊은 남자가 도전장을 내민다.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에드라는 청년의 기세에 내트는 도전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내트는 자신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러시아국 분국의 수장 자리도 받아들인다.
내트의 손에 부활하거나 사라질 그곳. 더 이상 가치가 없을 거 같았던 그곳은 폐기처분 될 스파이의 앞날과 비슷한 맥락으로 존재하고 있는 곳이다.
나는 현장 체질이다. 사무직도 사교직도 딱 질색이다.
한 번의 배드민턴 시합은 매주 월요일의 행사로 이어지고, 경기가 끝난 후 에드와 내트는 간단하게 한잔하는 시간을 보낸다.
주로 에드가 내뱉는 말에 적당한 추임새를 넣어주는 자리지만 내트에게 그 시간은 소중해진다.
이 시점에서 베테랑 스파이의 감이 떨어진건가? 라는 생각이 든다.
클럽 회원도 아닌데 내트와 한판 붙기 위해 일부러 이 사람 저 사람과 시합을 해서 도전장을 내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낸 에드에게 어째서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 걸까? 스파이도 아닌 나의 오지랖이 촉을 세우게 만든다.
에이전트 러너는 비밀에 접근 가능한 사람들을 포섭해 관계를 유지하고 비밀 확보를 위해 지시와 지원을 하는 고급 요원을 가리킨다.
내트가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시작이 아니다. 끝을 이야기하는 이야기지.
사람들 사이에 숨어서 절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정보를 캐는 사람.
보통 사람보다 더 보통으로 살아내는 사람.
그래서 은퇴를 앞둔 스파이의 이야기는 긴장감 없어 보이면서도 긴장되고, 주절주절 불필요한 말들이 많은 거 같은데 핵심을 숨겨두고 있다.
내트의 마지막 작전은 자신의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정보를 얻고
자신이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을 독자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미 내트와 카레에게는 의미 없는 일이다.
현실을 모두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언제나 열심히, 잘, 일하는 사람은 제외되고, 소외된다.
비리와 자기 이익에 눈먼 능력없는 사람들은 승승장구하는 가운데 말이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물들지 않는다는 건 이런 게 아닐까?
소신을 지킨다는 건 이런 게 아닐까?
내트같은 현장 요원들이 점점 사라지고
돔과 브린 같은 인물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좌지우지하는 동안
더 많은 사람들은 갈등하게 될 것이다.
냉정함과 따뜻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에이전트 러너.
진짜 스파이가 어떤 건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우리가 스파이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영화가 심어 놓은 환상에 불과했다.
진짜 스파이는 나보다 더 나 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진짜를 알고 나면 더 무섭고 소름 끼치게 된다.
그들은 절대 내가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