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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 젖은 땅 -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 ㅣ 걸작 논픽션 22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3월
평점 :
1937년과 1938년의 대숙청 시기에 숨져간 수십만 명의 소련 농민과 노동자는 스탈린의 명확한 지시에 따른 희생자였으며, 그것은 1941년과 1945년 사이에 히틀러의 명확한 지시대로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총과 가스에 희생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2차 세계대전을 떠올리면 공식처럼 새겨지는 이름들이 있다.
히틀러, 유대인, 아우슈비츠 수용소
2차 세계대전은 아주 많은 희생자들을 내고 많은 나라들을 고난 속에 묻었지만
최고의 희생을 대표하는 이름은 유대인이었다.
피에 젖은 땅을 읽고 난 지금 나의 생각은 달라졌다.
히틀러는 다른 민족을 처단했다.
이유가 무엇이었던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그의 동족을 멸했다.
정치적 이념을 들이대며 그들의 재산을 빼앗고, 그들을 굶어죽게 만들고, 서로를 잡아먹게 만들었으며 그것도 모자라 총살시켰다.
그들의 땅을 블러드랜드로 만들었다. 피에 젖은 땅으로...
히틀러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던 스탈린의 만행이 세상에 드러나는 시기가 왔다.
이 책 피에 젖은 땅을 통해서.
수많은 기록들을 토대로 스탈린의 행적을 짚어낸 피에 젖은 땅.
블러드랜드는 1933년부터 1945년 사이에 나치(독일)와 스탈린(소련)으로 인해 수많은 인명이 희생된 곳으로
독일과 소련 사이에 있는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해 3국. 이곳에 바로 피에 젖은 땅이다.
수많은 인명이 소멸된 땅이자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원혼들의 땅이다.
솔롭키는 북극해의 섬 위에 세워진 포로수용소였다. 우크라이나 농민의 마음속에 솔롭키란 고향에서 추방당하면서 느끼는 모든 고립과 억압, 고통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소련 공산당 지도부에게 솔롭키란 추방자의 노동력이 국가의 이익으로 바뀌는 최초의 성과를 나타내는 이름이었다.
스탈린은 공산주의의 이념을 내세워 농촌에 집단 농장을 만든다는 구실로 부농을 해체했고, 농민들의 식량을 수탈해서 수출했다.
다음 해 심을 곡식조차도 남겨두지 않고 차출했기에 농민들은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했고, 그런 상황을 알리지 않으려고 도시를 폐쇄했다.
어디로도 가지 못했던 사람들은 앉은 자리에서 굶어 죽었다.
길을 떠난 사람도, 떠나지 않고 남았던 사람도 모두 굶어 죽었다.
죽지 못한 사람들은 시체를 뜯어 먹으며 살아야 했다.
그곳은 죽음의 땅이었고, 그곳의 참상은 어디에도 전해지지 않았다...
전하고 싶어도 전할 사람이 남아있지 않았던 피에 젖은 땅.
수많은 기록을 참고로 2차 세계대전의 또 다른 얼굴을 파헤친 기록. 피에 젖은 땅.
작가의 서문부터 미친 듯이 인덱스를 붙였다.
딱딱하고 고리타분한 전쟁의 기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마치 에세이를 읽는 것처럼 감상적인 문체로 이 끔찍한 참상을 전하고 있었다.
히틀러와 독일이 2차대전의 가해자로 악명을 떨치는 사이 소련과 스탈린은 그 뒤에 숨었다.
어쩜 그 악랄하고 끔찍한 참상을 말해 줄 사람들이 모두 죽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어쩜 그 참상을 말하고 싶어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21세기에 와서야 나는 겨우 이 책을 통해 아주 가까운 곳에 히틀러 버금가는 이가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되었다.
공산주의라서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던 걸까?
아니면 유대인의 희생에만 초점을 맞춰서 상대적으로 이 피에 젖은 땅에서의 살육은 잊힌 걸까?
아니면 인종차별이 아니라서 관심을 덜 받은 걸까?
피에 젖은 땅을 읽으며 나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벌어진 살육의 현장도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히틀러가 유럽에서 유대인을
스탈린이 자신의 조국에서 동포를 살육하는 동안
일본이 동아시아 일대에서 벌인 살육의 현장에 대한 기록도 존재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1945년 이후로 76년의 세월이 흘렀다.
반세기가 지나고 1세기가 가까운 시점에서야 스탈린의 만행이 만 천하에 공표되었다.
일본의 만행은 어디에서 시작 중일까?
역사는 살아남은 자들의 기록이다.
피에 젖은 땅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그들은 어떻게 그 많은 죽음을 설명할 수 있었을까?
식민화에서, 이데올로기는 경제와 서로 얽혀들었다. 행정에서, 그것은 기회주의 및 공포와 연결되었다. 나치와 소련의 경우 모두, 대량학살의 시기는 또한 열정적인, 아니면 최소한 일사불란한 행정 처리의 시기이기도 했다.
한 체제의 리더가
한 나라의 리더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끌어 가느냐에 따라 세상은 달라진다.
2차 세계대전은 전쟁을 필요로 했던 사람들이 눈 감은 덕에 수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우리가 이 전쟁을 계속 알아내고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희생자는 애도자의 뒤에 가려져 있다. 살육자는 숫자들 뒤에 숨어있다. 막대한 죽음의 숫자를 읊조리는 것은 익명성의 흐름에 숨어 버리는 일이다. 죽은 뒤에 서로 경쟁하는 국가별 추념에 따라 명단에 실리고, 개별적인 삶을 부수적으로 다루는 숫자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 그것은 개인을 말살하는 일이다.
역사란 각 개인은 환원할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통계라는 숫자라도 있어서 이 책을 내가 읽을 수 있었다.
피에 젖은 땅에서 이유 없이 사라져간 그들은 숫자로, 통계로 남았다.
그 숫자가.
그 통계가
바로 그들의 역사다.
나는 그들이 그렇게라도 이야기하기를 바란다.
개개인의 역사를 알 수 없다 하더라도 그들이 희생된 이유가 저 가당찮은 자들의 자기만족이었고
그 작자들 밑에서 눈 감고, 귀 막고, 입 막은 동조자들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걸 숫자로만 남은 통계가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먼 나라 이야기로만 생각했었다.
유럽에서의 전쟁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왜 우리가 2차 세계대전과 관련 있다는 생각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왜 우리는 유대인과 다르다고 생각했을까?
전체적으로 보아야 하는 안목을 길러준 이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분적인 역사, 시험에 나오는 역사만 중요했기 때문이다.
피에 젖은 땅이 스탈린과 소련의 만행을 알리고 피에 젖은 땅에서 희생된 이들을 이야기했다.
이후에 또 다른 2차대전의 피해자들에게도 이런 기회가 오기를 소망해본다.
전쟁사를 이야기한 책이고
알려지지 않은 이들의 희생을 이야기한 책이지만
내겐 아직도 묻혀있는 내 나라의 과거를 더욱 생각나게 해주는 책이었다.
2차 세계대전을 이전까지와는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