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은.
주인집 아들에게 유혹당한 하녀가 아이를 갖고 쫓겨나게 마련인데
카프카의 실종자는 35살 먹은 노련한(?) 하녀에게 유혹(?) 아닌 능욕 당해서 아이를 갖게 한 죄(?)로 부모에게 쫓겨나서 미국으로 추방당한 카알이 등장한다.
미국에 도착해서 트렁크를 들고 배에서 내리다가 우산을 놓고 온 걸 기억하고 트렁크를 모르는 남자에게 맞기고 우산을 찾으러 가다가 길을 잃는.
정말 답답하고 아무 생각 없어 보여서 짜증까지 유발하는 카알이라는 주인공을 만나게 된다.
물론 그 이유로 카알은 우산 대신 화부를 만나게 되고, 그로 인해 미국의 상원 의원인 외삼촌까지 만나게 되니 어찌 보면 카알은 선견지명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카알의 인생이 그리 순탄한 건 아니었다.
외삼촌 덕에 편안함 삶을 영위하려나 싶었지만
외삼촌이 반대하는 폴룬더씨댁에 방문한 카알에겐 외삼촌의 결별이 선언된다.
다시금 트렁크와 우산만 남게 된 카알의 인생은 어디로 흘러갈까?
그렇게 다시 쫓겨난 카알은 어느 여관에서 두 남자를 만난다.
똑똑한 척했지만 결국 카알은 두 남자에게 이용당하는 처지가 된다.
로빈슨과 들라마르쉬는 철저하게 카알을 이용한다.
이용당하는 줄 알면서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카알.
다 아는 거 같고
옳은 생각을 하면서도
결국 나아가지 않고 스스로를 현실에 묶어 놓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카알에게서 보인다.
한 발.
그 한 발만 다르게 내디디면 다른 삶을 향해 갈 수 있을 텐데.
고집스럽게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
이 작품은 아메리카라는 제목으로 처음 소개되었지만 이후에 카프카의 일기에서 실종자라는 제목이 쓰였으므로 실종자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판되었다.
성, 소송, 실종자 이렇게 카프카 고독의 3부작이 탄생한다.
미완으로 끝난 실종자.
어쩜 카프카가 결말을 내지 않고 미완으로 남긴 것이 카알에게는 더 희망적이지 않을까?
우리는 카알이 검사에 합격해서 아메리카에서 자리를 잡아 당당하게 뉴욕에 입성하여 외삼촌 앞에 설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카프카가 정해 놓은 결말을 아무도 알 수 없음으로 나는 희망스러운 결말로 실종자를 이야기하고 싶다.
카알은 어린 나이에 여러 곳에서 추방당한다.
가족에게 추방당해 낯선 땅에 오고
그곳에서 역시 가족에게 추방당해 떠돌게 된다.
그러다 호텔 엘리베이터 보이로 잠시 안착하는 가 싶더니 잠깐의 근무 태만으로 인해 역시 추방당한다.
아마도 카알이 브루넬다 곁에 끝까지 남은 이유는 어떤 관계에 매듭을 짓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타의에 의해 추방 당했던 카알의 인생에 처음으로 일방적인 추방이 아닌 관계의 끝맺음을 할 수 있었던 게 바로 브루넬다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래서 비로소 카알에게는 하나의 단계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카알의 다음 이야기가 지금처럼 어설프지 않을 거라 믿고 싶은 거다.
실종자.
어쩜 우리는 인생에서 어느 기간은 실종자로 살아가는 건지도 모른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방황하는 동안이 세상에서 실종자로 살아가는 시간이다.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자신이 할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분별하게 되는 시간.
자신의 이름을 누구에게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시간.
사회로부터 어떠한 인정을 받게 되는 그 증명의 시간.
그것을 통과하지 못한 실종자는 아마도 카알처럼 닿지 않는 곳을 그리며 어디가에서 자신의 이름을 감추며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