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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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만 삶의 마땅찮은 불상사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고, 어느 누구도 자기를 내쫓을 수 없는 그런 확실한 곳으로서, 온전하게 자기 혼자만의 소유로 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24호실을 처음 보았을 때 그는 그곳이 바로 그런 곳이 되리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천진한 삶을 살았던 조나단 노엘.

어느 순간 어머니가 삶에서 사라지고, 또 어느 순간 아버지가 삶에서 사라졌다.

어린 여동생과 함께 탈출해서 먼 친척 아저씨에게 의탁하다 군에 들어간 노엘.

군에서 돌아왔지만 여동생은 결혼해서 보이지 않고 친척 아저씨의 소개로 얼굴도 모르는 여자랑 결혼한 지 4개월 만에 애 아빠가 된다.

하지만 그녀는 과일 장수와 눈이 맞아 떠났다.


그 누구도 그의 곁에 남지 않았다.

그가 원한 건 그저 인생의 평화였을 뿐인데...


자신의 모든 걸 정리해서 파리에 온 노엘에게 작은방 하나가 주어진다.

온전히 쉴 수 있는.

온전히 자신만의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곳.


그곳은 조나단에게 불안한 세상 속의 안전한 섬 같은 곳이었고, 확실한 안식처였으며, 도피처였다. 그곳은 그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는 애인, 정말 애인 같은 장소였다.

3.4미터의 길이와 2.2미터의 폭과 2.5미터의 높이로 이루어진 방.

그곳은 조나단의 밀실이자, 평화이자, 은신처였다.


그가 도망쳐서 쌓았던 방어기제는 20년 뒤 비둘기 한 마리에 의해 산산조각이 난다.

보통과 똑같은 일과를 시작한 아침.

공동 화장실을 가기 위해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나선 그 순간에 복도에서 오롯이 그와 마주친 비둘기 한 마리.

엄습하는 공포가 조나단을 휘감아 담아 두었던 삶의 모든 절망과 고통과 슬픔을 끄집어 내던 순간이었다.


그 하루.

그가 흘린 땀과

그가 분출한 분노와

그가 표출해낸 것들은 20년간 꾹꾹 참아왔던 그의 고통과 슬픔이었다.


내일 자살해야지.

홀로 삭히고 삭혀서 어딘가로 보내 버렸던

그의 삶의 부재들이 남긴 찌꺼기들.

그때 아파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지 못하고 그저 꾹꾹 눌러 담아 두었던 삶의 부조리함이 비둘기의 눈을 통해 관통되었다.


그가 그날 본 것은 비둘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고통과 슬픔이었다.


도대체 사람들이 왜 안 오는 걸까? 왜 나를 구출해 내지 않지? 왜 이렇게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지? 다른 사람들이 없으면 나 혼자서는 절대로 살 수가 없단 말이야!

오랜 시간 혼자 감당해 오던 삶을 이제야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순간이다.

비둘기의 눈을 통해 관통당한 자신의 젊은 날은 절절하게 고독했고, 철저하게 방어적이었다.

평화와 안온함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그의 철벽성이었다.


세상과의 단절을 이루고 살았던 조나단 노엘의 어느 날 아침은

비둘기 한 마리가 모두 망쳐 놓았고, 그 비둘기 한 마리가 모두 되살려 놓았다.


자기 자신을 이루고 있던 보호막 밖으로 한발 내디딘 순간의 하루.

문이 열렸다. 그는 자유 속으로 걸어 나갔다.

완전히 비어버린 복도가 조나단의 앞길이길 바랐다.

그리고 그가 끌어안고 살았던 그의 과거이기를 바랐다.


책 중간쯤에서 조나단이 좀머 씨로 보였다.

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조나단은 좀머 씨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조나단의 과거는 그날 하루

비둘기에 의해 온전히 비워졌으므로...


*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았으나, 온전히 내 맘대로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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