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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 ㅣ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2020년 4월
평점 :
그러니 제발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 제발 나를 좀 그냥!
절규처럼 들리는 저 문장은 좀머 씨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문장이다.
긴 막대기와 밀짚모자 배낭을 메고 하루 종일 온 사방을 돌아다니는 사람.
좀머. 독일어로 여름을 뜻한다는 좀머.
한 소년의 푸릇푸릇 한 성장기가 전반적인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면 간간이 출연하지만 잠시도 존재감을 멈추지 않는 좀머 씨의 이야기는 소년의 파릇함에 대비되는 어두움이다.
사람이 한 번에 두 가지를 다 가질 수는 없는 법. 세상에 대한 복수와 세상 안에서의 영생. 그래서 나는 복수를 택하기로 했다!
지각했다고 노발대발하는 피아노 선생님이 묻힌 건반 위의 코딱지 때문에 계속해서 틀린 연주를 해야 했던 소년.
그로인해 엄청난 꾸중을 듣고 자살을 결심했던 소년의 울분은 좀머 씨의 고통스러운 한숨 속에 막을 내린다.
폐소 공포증.
전쟁 중에 입은 상흔이 좀머 씨를 조금씩 좀먹어 갔는지도 모르겠다.
한곳에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만든 그의 과거는 무엇이었을까?
장자크 상페의 그림으로 각인되는 좀머 씨.
단순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그림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머릿속을 떠다닌다.
좀머 아저씨는 가끔씩 사람들 눈에 띄기는 하였지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표현을 빌자면 세월 다 보낸 사람이었다.
소년이 한창 아름다운 시절을 보내던 어느 날 저녁
그는 호수 안으로 사라져가는 좀머 씨를 보게 된다.
엄청난 사실을 눈앞에서 보게 되면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아직 인생의 시작점에 겨우 선 소년의 눈에 좀머 씨의 모습은 죽음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내가 어째서 그렇게 오랫동안 또 그렇게 철저하게 침묵을 지킬 수 있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누가 쥐스킨트일까?
엉뚱하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호수 속으로 사라진 좀머 씨일까, 침묵을 지킨 소년일까?
그날의 일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못한 소년이 자라서 좀머 씨 이야기를 끄적인 게 아닐까?
은둔자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는
침묵과 함께 사라져서 영원히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을 거 같은 여운을 남긴다.
나와 소년은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좀머 씨의 마지막.
철저하게 외로웠던 영혼은 그렇게 사람들에게서 사라졌다.
가끔 궁금해하지만 아무도 찾지 않는 좀머 씨.
한 사람의 기억 속에 갇힌 좀머 씨.
단 한 마디만을 남겼지만 여전히 울리고 있는 목소리.
"그러니 제발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
*출판사로부터 지원받은 도서이나 온전히 내맘대로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