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 마녀 또는 아그네스
해나 켄트 지음, 고정아 옮김 / 엘릭시르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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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내 진술을 뒤틀어서 악의를 덧씌웠다.

내가 한 말들은 나와 분리된 채 멋대로 가공되어 결국은 나와 무관한 이야기가되었다.

아이슬란드의 마지막 사형수 아그네스 마그누스도티르.

아주 추운 나라라는 것만 알뿐 아이슬란드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나로서는 그들의 이름을 읽는 것부터가 힘이 들었다.

낯선 이름들 앞에서 발음이 생소한 지명들 앞에서 과연 이 이야기를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페이지를 넘겼지만 곧 그것과는 상관없이 이야기에 푹 빠져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는 걸 말하고 싶다.


나를 언제 죽일까. 그때까지 어디에 둘까. 버터처럼, 훈제 고기처럼 지하 저장소에 둘까. 시체처럼 땅이 녹을 때까지 보관해두었다가 돌멩이처럼 흙 속에 던져버릴까.


두 남자를 살해하고 농장에 불을 지른 죄목으로 사형수가 된 아그네스 마그누스도티르.

사형 날짜가 정해질 때까지 코르든사우 농장에서 지내게 된다.

적대적인 뢰이가와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 스테이나는 코르든사우 농장의 딸들이다.

아그네스의 존재는 농장 사람들과 인근 사람들에게 불편한 존재였다.

자신들과 함께 생활하게 될 살인자를 환영할 곳이 어디에 있을까.


아그네스는 이제 막 목사 자격을 딴 젊은 목사를 지목한다.

토티 목사는 코르든사우 농장으로 가서 아그네스의 이야기를 듣는다.

죄를 참회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엔 아그네스가 너무 똑똑했고, 그녀에게 신앙을 강요한다는 게 부당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형을 눈앞에 둔 아그네스에게 도움이 될 것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 토티 목사에게 아그네스는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한다.


사생아로 태어나 엄마에게 버림받은 아그네스는 어린 나이에 이곳저곳을 떠돌며 하녀로 살았다.

하녀로서의 삶이 녹록지 않았겠지만 유달리 총명했던 아그네스에겐 안 좋은 소문들이 따라다녔다.

나탄을 따라나섰을 때에도 그랬다.

나탄과 그녀 사이의 일들은 누구라서 다 알까?


그들은 내 방식의 설명을 허락하지 않았고, 내게서 이들뤼가스타디르와 나탄의 기억을 빼내 그것을 음험하게 만들었다.

아그네스와 토티 목사, 코르든사우 농장의 안주인 마르그리에트의 시점으로 번갈아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리고 실제 남아 있는 기록들이 이야기 사이사이에 담겨 있다.

아그네스는 나탄에게 속았다. 나탄과의 미래를 꿈꾸던 그녀는 나탄에게 쫓겨나고 그것에 앙심을 품어 살인을 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해나 켄트의 손에서 되살아난 아그네스의 말은 다르다.

그리고 아그네스와 토티, 그리고 스테이나의 인연은 그들이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사람이 된 이유를 말해준다.

작은 친절이 결국 외로운 길에서 그녀에게 말을 걸어주는 인연이 되었다는 사실을...


낯선 아이슬란드의 생활들과 삶의 방식이 이 책을 더 독특하게 만들고

해나 켄트의 필력이 이야기에 깊이를 더했다.

나는 잠시 아그네스가 되어 그녀의 절망과 슬픔과 아픔을 느껴보았고, 마르그리에트가 되어 완벽하게 차단했던 마음들이 겹겹이 벗겨지는 경험을 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그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해낸 작가의 열의가 21세기에 아그네스를 되살려 놓았다.

그녀의 참 모습을 알 수 없겠지만, 아마도 아그네스가 사라진 그 계곡에서 해나 켄트가 받은 영감은 아그네스의 마지막 염원이 아니었을까..

모든 기록과,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녀를 소재로 쓴 다수의 책들을 참고해서 다시 탄생한 아그네스.


나중에 그는 그날 하루 종일 저를 봤는데 읽히지 않더라고 말했어요. 처음에 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연하죠, 자는 책이 아니라 여자니까요. 하고 대답했죠. 그러자 그가 웃음을 터뜨리더니, 자기는 사람도 책처럼 읽는데 가끔 모르는 언어로 적힌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고 했어요.

그 시대에 아그네스는 모르는 언어로 쓰인 사람이었다.

지금 이 시대에 아그네스는 모두가 아는 언어로 자신을 읽어주길 바라는 거 같다.


그녀는 나탄을 사랑했다.

나탄이 죽어 마땅한 개자식이었다고 해도.

아그네스가 나탄을 사랑했다는 그 사실이야말로 그녀가 읽어주기를 바라는 대목이 아닐까.



*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았으나, 온전히 내 맘대로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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