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중록 1
처처칭한 지음, 서미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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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사건은 커다란 나무 한 그루와 같다. 땅 위로 보이는 부분은 사소한 것에 불과하고, 땅속으로 거대한 뿌리가 얽히고설켜 땅을 파보기 전까지는 거기 파묻혀 있는 진실이 무엇인지 영원히 알 수 없다.

온 가족을 독살하고 사랑의 도피를 하려다 들통났다는 누명을 쓰고 잠적한 황재하.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크고 작은 사건들을 풀어서 장안에 화제가 된 소녀 황재하.

그녀가 남장을 하고 장안에 숨어든다.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해 용감하게 장안으로 들어왔으나 운명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그녀는 황제의 동생 기왕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키고 만다.


만일 전하께서 저를 도와주신다면 저 또한 전하를 대신해 그 사건의 진상을 밝혀드리겠습니다. 아무리 오래된 사건이라 할지라도, 단서의 유무와 상관없이 반드시 진상을 밝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왕과 모종의 딜을 한 황재하는 양승고라는 이름의 환관으로 새로운 신분을 부여받고 기왕전에서 살게 된다.

그리고 특유의 추리력을 동원하여 장안을 불안에 떨게 했던 사건을 해결해낸다.

그렇게 기왕에게 신임을 받게 된 황재하는 황제에게도 눈도장을 찍게 되고 밖으로는 기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환관으로 소문이 난다.


황제는 기왕을 장가보내려 사주단자는 들이고 기왕은 황후 집안의 여식을 왕비로 선택한다.

하지만 왕비로 선택된 왕약에게는 뭔가 숨기는 기색이 보이고

기왕을 헤치기 위해 왕약에게 위해가 가해질 거라는 소문이 도는 와중에 왕약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일이 벌어진다.

그것도 기왕과 황재하의 눈앞에서.

과연 황재하는 또다시 기왕을 도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로맨스 추리소설이라고 내 맘대로 정해본다.

중국 소설답게 인물을 표현하는 방식이 상당히 거창하고 낯간지러운 표현들이 많다.

그럼에도 닭살 돋는 대신에 마음이 달달해지는 느낌이 드니 이 찬 바람 부는 가을날에 녹녹하게 녹아드는 설레는 마음이 싫진 않다.


작년에 불어온 잠중록의 바람을 조금 늦게 탔다.

다들 왜 그렇게 허무맹랑한(그때까지 중국 소설은 거의 다 무협소설이라고만 생각하는 편견이 있었다.) 이야기에 열광하는지 몰랐다.

아마도 그래서 읽기를 거부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내가 좋아하는 추리가 주를 이룬다는 소리에 독서카페 회원들과 함께 읽기에 도전했다.

음... 편견이란 건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무지를 깨고 나온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추리와 스릴러로 단련된 마음이 달달함으로 코팅되었다.

남장을 하고 기왕전에 숨어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한 날을 기다리며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풀어 헤치는 황재하의 멋진 모습이나

그런 황재하에게 조금씩 마음이 열려가고 있는 냉철한 장안남 이서백의 필까 말까 하는 사랑의 봉오리는 독자의 마음에 판을 깔아 놓았다.

게다가 연이어 벌어지는 살인과 그것을 추리해서 밝혀지는 사실들이 책을 읽는 맛을 배가한다.

이 모든 일이 가문을 위한 한 사람의 욕심과 한 여인의 운명에 대한 도전이었다니!


한 여인이 자신의 운명을 거짓으로 바꿔놓은 그때부터 인생의 궤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해 결국 많은 사람의 운명을 뒤바꿔버렸다.


중국 사람들의 스케일이 커서 그런가?

대륙의 마음은 그렇게 방대한 것인가?

어찌 그런 여인의 죄가 용서가 되는지!

어찌 그런 가문의 죄를 묵인하는지!

하지만 이 잠중록의 작가가 풀어 놓는 인물들의 서사는 제각각 그들을 용서하고 이해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날 오후 나는 내 안의 순진함을 버렸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현실 앞에서 아무 쓸모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내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내가 살아남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잘 살아남아서... 시장에서 구걸하는 날 따위는 절대 맞이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 사람의 상황이 이해가 되면서도 그 많은 피를 묻힌 손으로 어찌 살아갈지가 걱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용서받은 이유가 다음번 이야기에서 어떻게 변수로 작용할지도 궁금하다.

이제 황재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 한 사람 더 늘었으니.

그리고 그녀를 알아본 사람이 또 한 명 있었으니... 그는 황재하를 어떻게 할까?


재하야, 재하야. 모시기 힘든 이분을 주인으로 선택한 건 바로 너란다. 그러니 어찌 됐든 따르는 수밖에 없지 않겠니. 그곳이 물속이든 불속이든 주인께서 명령하시면 뛰어들어야지!

황재하와 이서백 그리고 왕온 이들의 관계는 어떤 사건 위에서 판가름이 날까?

다들 남정네들의 멋짐에 반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황재하의 멋짐에 반하는 중이다.

열일곱 소녀의 명석함에 이토록 빠질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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