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슬기.
2007년 10월 14일.
자고 일어나니 얼굴 한쪽에 마비가 왔다.
안면 마비.
중학교 1학년이었다.
수많은 병원을 다니며 희망을 걸어봤지만 그녀의 희망은 매번 실망으로 끝났다.
원인도 알 수 없는 안면마비는 그녀를 떠나지 않았으니까.
중학교 1학년.
14살에 찾아온 그 일을 아이는 어떻게 견뎌냈을까?
그녀에겐 할머니가 있었고, 엄마가 있었다.
물론 다른 가족도 있었지만 그녀의 글에서 제일 많이 언급된 가족의 이름은 할머니와 엄마였다.
그만큼 슬기 작가가 의지하고, 그녀 곁에 제일 많이 있어 주었던 분들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그녀의 아픔보다도 사람들의 무신경함에 더 신경이 쓰였다.
그 무신경한 사람들 대열에 나도 들어 있는 거 같아서.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아픔으로 느끼지 못하는 공감 불능력자들이 많은 거 같다.
나 역시 그런 사람은 아니었나를 되씹어 보는 시간이었다.
누군가의 아픔 앞에서 나는 침묵했거나, 외면했거나, 모른척했었던 거 같다.
이유는 치졸하지만 상대방을 배려한다는 나의 무지였다.
아는 척하는 게 왠지 미안하고, 물어보기 겁나고,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아마도.
슬기 작가의 주변에도 나 같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그녀의 고통과 외로움을 같이 느껴봤다.
그녀가 무심코 받았을 많은 상처들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누군가의 아픔을 제대로 알기란 참 어려운 것이다.
이 책에 담긴 그림들은 슬기 작가의 그림이다.
그녀의 아픔을 놀림감으로 생각한 사람들도,
그녀의 아픔을 돈벌이로 생각한 사람들도,
이 책을 읽으며 자신들을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하지 마'는 내가 옳지 못한 행동을 했을 때 가르치는 말인데, 아프지 말라고 나한테 가르치는 건가 싶다. 저게 걱정할 때 쓸 만한 말이 맞나? 그리고 아프지 않는 게 내 맘대로 되나? 누구보다 아프면 나부터가 싫다. 누구보다 나 자신이 제일 아프지 않고 싶다고. 나도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게 아닌데...
보통 아픈 사람에게 늘 하는 말은 '아프지 마'라는 말이다.
이 말이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는 걸 슬기 작가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아프고 싶어서 아픈 사람은 없다.
그런 사람에게 아프지 말라고 말하는 건 어떤 도움의 소리인 걸까?
앞으로 다른 위로의 말을 생각해 둬야겠다.
어떤 원인으로 발병한 건지
왜 치료가 안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아마도 본인 자신이 제일 답답했겠지만.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고통을 받았을 텐데도 불구하고
글이 참 귀엽다.
귀엽다라는 표현을 쓴 건 이 글에서 원망이나 분노가 느껴지지 않아서다.
20대의 그녀지만 아직도 풋풋한 14살 소녀의 모습이 글에 담겨있다.
그래서 글들이 귀엽다.
원망과 분노가 아닌 귀여운 투정의 글이 그래서 더 아프기도 하고, 그래서 더 와닿기도 했다.
사진 속 내 아픈 표정은 웃음이 될 수도 없지만, 추억이 될 수도 없을 테니까.
사진 찍지 말아 달라는 그녀의 요청을 무시하고 대놓고 이상한 사진만 찍어 올린 사람들은 반성해야 한다.
그들이 꼭 이 글을 읽어 보았으면 한다.
자신들이 어떤 상처를 아무렇지 않게 주었는지 알고 반성하기를 바란다.
나는 슬기 작가가 이 글을 쓰는 동안 자신을 단련시켰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자신을 이미 노출시켰다.
그건 그만큼의 자신감이 만들어 낸 일이다.
성형수술을 고려했던 그녀에게 의사 선생님이 해주신 말은 정말 의사로서 그녀에게 해준 말이니 그녀가 그 말을 깊이 새겼으면 좋겠다.
지금의 모습을 나아지게 만들기 위해 더 큰 상처를 숨기고 다니는 그런 오류를 범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답다는 것은 결국 슬기롭다는 것. 그 자체니까.
이름처럼 잘 살 거라 믿는다.
그녀의 글에 담긴 온기처럼.
그녀의 곁에서 그녀를 지켜주는 가족들의 사랑 안에서 낯모르는 사람들에게서 받는 고통들이 씻길 거라 믿는다.
이 글이 많이 읽혀서 슬기 작가를 아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누군가 무심코 그녀의 왼편에 서게 되었을 때 그녀가 불편해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으면 좋겠다.
김슬기 작가님.
이름처럼 슬기롭게 앞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