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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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모두들 다른 사람의 기억에 남지 못해 안달인지 모르겠다. 그러면 뭐가 좋을까? 모두들 잊고 두 번 다시 입 밖으로 꺼내지 말아야 할 일들도 있는 법이다.

 

 

그레이스 마크스는 실존 인물이다.

1840년대 열여섯의 나이로 살인범으로 기소된 캐나다에서 악명 놓은 여성 범죄자다.

그레이스는 마거릿 애트우드가 그레이스 마크스의 이야기를 작가로서 재구성한 이야기다.

실재와 상상이 혼합된 이야기인 만큼 이 책을 이해하는 마음도 복잡하다.

 

주인공 그레이스와 그녀를 연구했던 사이먼 조던 박사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레이스에 몰두하다가도 사이먼의 이야기에서 그레이스에 대한 의심이 생긴다. 마치 내가 사이먼처럼 생각하는 거 같다.

그녀의 진실은 무엇일까?

 

그가 내 말을 받아 적으면 마치 나를 그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아니, 나를 그린다기보다 내 위에(내 살갗 위에) 지금 쓰고 있는 연필이 아니라 옛날식 거위 깃펜으로, 그것도 펜촉이 아니라 깃털로 뭔가를 그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수백 마리의 나비가 내 얼굴을 덮고 날개를 부드럽게 폈다 접었다 하는 것 같다.

 

 

몽롱한 이야기 너머로 의심스러운 여자가 보인다.

어딘지 모르게 광기 어린 모습이 진짜인지 꾸면 낸 것인지, 편견 때문에 그리 보이는 건지 알 수 없다.

열여섯의 나이에 두 사람을 죽인 살인죄로 잡혀서 사형을 구형 받았다가 구사일생으로 종신형을 받고 복역 중인 여죄수.

그녀에게 동정심을 갖고 그녀를 석방시키려는 사람들과 그녀를 살인자로 믿는 사람들의 관심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속에서 정신병원을 설립하고자 하는 젊은 사이먼의 패기는 어쩜 그레이스가 석방될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거 같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수록 알아내는 것보다는 잃는 게 많은 사이먼.

그는 조금씩 그레이스의 비밀을 캔다고 생각했지만 도리어 그녀의 이야기에 먹히고 있었다.

그녀를 갈망하는 수준은 다른 대행품을 찾고, 그것은 그의 발목을 잡고 늘어질 거 같다.

 

그레이스가 그랬든 사이먼도 결정적인 순간에 그곳을 빠져나온다.

자칫 한 발만 늦었어도 푹~ 빠져서 헤어 나올 수 없었을 그 진창에서 용케 도망친다.

어쩜 사이먼은 그레이스에게 한 수 배웠는지도 모른다.

안 좋은 기억을 잊는 방법을.

 

사람들은 이미 저를 유죄로 단정짓고 있었어요. 범죄를 저지른 게 분명하다고 일단 결론을 내리면 제가 뭘 하든 범죄의 증거로 해석하잖아요.

 

 

정말 그럴까?

그레이스는 정말 무죄일까?

읽어가는 동안 나는 그레이스가 마녀사냥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 시대에 많은 여자들이 그렇게 희생되었듯이.

하지만 다 읽고 난 지금은 무엇이 사실인지 갈피를 잡기 힘들다.

 

진실은 그레이스와 함께 영원히 자취를 감췄다.

그레이스는 무죄였을까? 명백한 유죄였을까?

 

내가 어떤 짓을 저질렀느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유죄나 무죄가 결정된다는 것을 그는 아직 모른다.

 

 

한때 순진했을지도 모를 그녀는

이제 닳고 닳은 모습으로 세상을 관망하고 있다.

아무도 그녀에게서 진실을 빼내지 못할 것이다.

 

그날의 진실은 그날 사라졌다.

떠돌아다니는 이야기도,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

정말 범죄일까?

30년이란 세월을 감방에서 보내면서 그녀는 도대체 무엇이 되었을까?

 

편의에 의해 사라지는 기억.

그것은 과연 정신병인가, 빙의인가, 다중인격인가.

 

입증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반증된 것 역시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출옥한 그레이스도 사라졌다.

우리에겐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역사만 존재한다.

 

아무도

그 일이 무엇 때문에, 왜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

 

그레이스는 어떤 면에서 완벽했다.

완벽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완벽하게 자신을 감췄다.

그 장단에 놀아난 사람은 그 시대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도 그레이스에게서 빠져나올 수 없다.

 

계속 궁금할 것이다.

그레이스가 가지고 사라진 그날의 진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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