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마음 델핀 드 비강의 마음시리즈 2
델핀 드 비강 지음, 윤석헌 옮김 / 레모 / 202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그러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바로 그 가을날이 왔다.

그전에는 괜찮았다. 그 이후에는 더 이상 괜찮지 않았다.

 

미쉬카 할머니는 예전 신문사에서 교정 교열을 보았다.

단어는 그녀의 생활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더 이상 단어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말이 멈추고,

발이 멈추고,

생각이 멈추고,

마음이 멈춘다.

 

모르겠어요. 그런데 느껴져요. 빠져나가는 게.... 빠져나가요.

 

 

그녀가 그토록 오랫동안 다루었던 단어들이 그녀를 빠져 나가고 있었다.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하고, 비슷한 발음으로 대체 되고, 어떤 것은 도저히 떠올리지 못하는 시간들.

상실의 시간이 이런 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술술 빠져나가고 있는 내가 가진 가장 큰 무엇.

남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는 단어들.

나이 들어서 얻을 수 있는 당연한 것들.

그래서 미쉬카는 악몽을 꾼다.

 

이런 것들이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어요, 미쉬카 할머니. 짧은 보폭, 깜박 졸기, 조그만 간식거리들, 짧은 외출들, 짧은 방문들.

작아지고 축소되었지만, 완벽하게 규정된 삶.

 

 

요양원에 보내진 미쉬카에겐 마리가 있다.

결혼도 안하고 아이도 없었던 미쉬카 곁에 이웃집 소녀였던 마리가 있었다.

어린아이에게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 주었던 미쉬카.

너무 일찍 상실의 아픔을 맛보고 있던 마리에게 그녀는 곁을 내어 주었다.

예전에 누군가가 미쉬카에게 그랬던 것처럼.

 

선행은 세대를 건너서도 이어진다.

미쉬카에서 마리에게로.

미쉬카는 점점 빠져나가는 말과 생명 사이로 오래전의 사람들을 찾는다.

나치의 손아귀에서 자신을 맡아 주었던 젊은 부부. 그 부부에게 미쉬카는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나는 언어치료사다. 말과 침묵, 말해지지 않은 것들과 일한다. 수치심과 비밀, 회한과 일한다. 부재와 사라진 기억들, 그리고 이름, 이미지, 향기를 거쳐 되돌아온 기억들과 일한다. 나는 어제와 오늘의 고통과 일한다. 속내 이야기들과.

그리고 죽는다는 두려움과 함께.

이런 것들이 내가 다루는 일이다.

 

 

제롬은 언어치료사다.

요양병원에서 일하는 걸 천직으로 여긴다.

말을 잃어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주고, 그 말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다.

그들의 말을 그는 녹음한다.

그들이 가고 나도 그 말들은 그에게 남아 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잃어버릴 줄 아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매주, 아니 거의 매일 새로운 손실과 손상, 손해를 입는 것이다. 이게 내가 이해한 바이다.

그리고 이득이 되는 것을 적는 칸에는 이제 아무것도 실려있지 않다.

 

 

요양원에서 이루어지는 미쉬카와 제롬의 만남.

미쉬카와 마리의 만남.

그리고 미쉬카의 꿈.

 

짧지만 응축된 감정들이 행간 사이사이를 꽉 채우고 있다.

미쉬카, 제롬, 마리 사이를 오고 가며 이야기가 끝났을 때 감정이 꽉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맹렬하게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을 깨닫게 된다.

 

완벽하지 않은 세 사람은 그 완벽하지 않음으로 서로에게 의지처가 된다.

서로를 품고 가게 되는 마음들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계속 나를 놀라게 하는 것, 심지어 경악하게 하는 것, 때로는 숨이 멎을 정도로 놀라게 하는 것 - 십 년도 넘게 이 일을 한 지금도 여전히 - 은 바로 어린 시절 고통이 지속된다는 점이다. 세월이 흘렀음에도 생생하게 타오르는 흔적. 그것은 지워지지 않는다.

 

 

노인들의 모습에서 그들의 젊은 시절을 유추해보면서도 제롬은 그들이 어릴 때 입은 상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깨닫는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어른으로 살아가면서도, 노인이 되었음에도 어린 시절의 상처는 되돌아오는 부메랑 같다.

제롬 역시도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책을 읽기 전에는 단순히 말에 대한 고마움을 이야기하는 걸로 생각했다.

공기처럼 늘 곁에 있어서 그 고마움을 깨닫지 못하는 말.

전작 [충실한 마음]처럼 이 고마운 마음 역시 읽고 나서도 정리되지 않은 마음들이 허공 속에 맴돌았다.

 

나는 고마움이라는 마음을 얼마나 가지고 살고 있을까?

보이는 고마움이든, 보이지 않는 고마움이든, 표현된 고마움은 과연 얼마나 될까?

단순히 고마운 마음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누군가 내게 해준 모든 행동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었다.

충실한 마음을 앞에 두고 생각이 많았다면, 고마운 마음을 앞에 두고는 어딘가로 흐르는 마음을 따라잡기 힘들었다.

철썩이는 파도처럼 감정들이 끊임없이 밀려온다.

 

프랑스어로 읽을 수 있다면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마다 쓰이는 언어의 차이로 원작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 옮길 수 없어서 번역자도 답답했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미쉬카의 말이 제롬과 마리에게 이어진다.

그 의미는 그녀를 아끼고, 알았던 두 사람만의 은어가 될 것이다.

 

"그냥요."

"거마워요."

 

나의 미래를 엿보는 기분으로 내내 읽었다.

선명하게 그려지는 모습들이 언젠가 내게도 닥칠 일이라는 걸 알려주는 거 같다.

제롬과 마리가 미쉬카를 대하는 그 마음들처럼 나도 그럴 수 있을까?

언젠가 내게도 제롬과 마리가 곁에 있을까?

 

고마운 마음.

이 마음이 지닌 의미를 살아가면서 깨우칠 거 같다.

앞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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