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땅
김숨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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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난아기와 황 노인. 금실은 문득 그 둘이 '한 인간'만 같다. 한 인간의 최초와 최후가 함께 열차에 실려가는 것만 같다. 열차가 마침내 최종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그 한 인간의 최초는 사라지고 최후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것 같은 생각마저 든다.

 

 

 

화물열차에 실려 떠난 것은 사람이었다.

사람임에도 사람 취급받지 못했던 조선인.

낯설고, 말설은 러시아의 척박한 땅에서 악착같이 무언가를 일구어냈던 조선인.

 

 

내 나라 땅을 강제로 점령한 일본을 피해 춥고, 메마른 그곳으로 떠났던 그들.

그곳에서 그들은 조선인도, 러시아인도 아닌 채로 살아내야 했다.

겨우 일궈 놓은 그들의 삶은 어느 날 강제 이주 명령에 의해 또다시 정처 없는 길을 떠난다.

 

 

누구는 제가 지은 집을 부셔놓고.

누구는 쓸만한 물건들을 모두 땅속에 묻어 놓고.

누구는 돌아올 남편을 위해 감자를 삶아 놓고, 옷가지를 곱게 개어 놓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질질 끌며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떠났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고, 어떻게 또 살아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이 탄 화물열차가 그들의 땅이었고, 그들의 잠자리였고, 그들의 한 가닥 희망이었다.

새로운 곳은 더 좋은 곳일지도 모른다는 희망.

 

 

하지만

그런 꿈은 몇 날 며칠 끝도 없이 흔들리는 땅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레닌이 지주들 땅을 몰수해 가난한 농민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주기로 했다는 소문을 듣고 내가 콧방귀를 뀌었지...아, 레닌이 땅을 모르는구나... 땅을 공평하게 나누는 건 불가능해....

 

 

 

늙은 부모들이 그저 땅을 일구며 살아내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그들의 자식들은 러시아 혁명 속에서 공산당이 되어 러시아인이 되고자 하였지만

그들은 일본의 스파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그 자리마저도 보전하지 못했다.

 

 

저마다의 슬픔과 사연들이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뿌연 먼지와 함께 흔들린다.

두서 없이 여기저기서 자신들과 마주하는 앞사람이거나 옆 사람에게 자기 이야기를 한다.

한 토막씩 건네지는 이야기에 구구절절하지 않은 사연은 없다.

 

그들에겐 이념도, 전쟁도, 나라도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내 핏줄들과 굶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보금자리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공산당에 가입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리 조선인들도 소비에트 인민이 돼야 한대요."

"그 전에 러시아인이 돼야 해."

 

 

 

 

그들 중 그 누구도 러시아인이 되지 못했다.

그들의 생김새는 러시아인이 될 수 없었다.

차별 없다던 공산주의마저도 그들을 차별했다.

부르주아도 아닌 그들의 모든 것을 빼앗았다.

 

 

인간이 땅을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더군. 인간은 살아 있을 때는 땅의 종으로 살다, 죽어서는 썩어 땅의 거름으로 쓰이니 말이야.

 

 

철저하게 한국인이자 농민이었던 그들에게 러시아의 화물기차는 어떤 의미였을까?

 

하룻밤 사이에 자신들이 일군 땅에서 강제로 쫓겨나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향해 가는 기차 안에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고려인.

까레이스키.

 

 

 

슬픔이 옅어진 사람들 얼굴에 절망, 분노, 원망 같은 악의적이고 파괴적인 감정이 뒤섞여 빚은 표정이 어린다.

 

 

 

김 숨식 대화법에 조금 길들여질만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들은 버려진 땅에 버려졌다.

버려진 그들은 땅을 파고 그곳에 터전을 마련한다.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아이들이 자랄 수 있는 땅으로 만들기 위해.

 

 

설국열차가 생각나는 이야기였다.

그들은 반란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앞 칸으로 나아가지도 못했지만

자신들이 버려진 땅에서 잡초처럼 다시 살아내었다.

 

 

그것이 바로 조선인이었다.

그들이 고려인이었고.

그들은 까레이스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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