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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 - 삶의 세밀화를 그린 아메리칸 체호프 ㅣ 클래식 클라우드 13
고영범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1월
평점 :

카버는 글을 쓰려면
고립된 장소가 있어야 했다. 작업은 대개 연필을 몇 자루 깎는 일로 시작되었다. 그러고는 노란색 노트 패드나 흰색 타자 용지에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한 특유의 악필로 쓰기 시작한다. 카버는 앉은 자리에서 초고를 끝내는 것을
좋아했다.
읽어 본적 없는 작가의 일대기부터 알게 되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내게 레이먼드 카버는 이름은 들어본 적 있지만 알지 못하는 작가였다.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열세 번째는 [대성당]의 작가 레이먼드 카버이다.
가난을 등에 지고 평생을 살아왔던 그에게 술은 혹이나 다름없었다.
이른 결혼으로 일찌감치 가장이 되었고, 대를 물린 가난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대학을 다니고 계속 글을 썼다.
앉은 자리에서 초고를 완성하는 걸 좋아하던 그에게 더없이 부족한 것이 바로 혼자 있는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 짬짬이라도 글을 쓸 수 있었던 건 첫 부인 메리앤 덕이라 말하고 싶다.
카버가 방황하는 내내 가정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해야 했던 그녀 메리앤.
그녀는 웨이트리스로 일하면서도 기회가 닿는 틈틈이 대학으로 돌아갔다.
그녀에게 좋은 기회가 올 때마다 견디지 못하고 묵살해 버린 건 카버였다.
카버는 대단히 보수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면에서.
메리앤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그렇지만 현실의 비주류들에게 가지는 편견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현실을 사는 사람이라 그런지 살아가면서, 배워가면서 그 편견들을 시류에 편승해가며 바꿔나갔던 거
같다.
처음으로 그에게 기회가 주어지고, 자신을 옭아매던 가난에서 구원받았던 그 시기에 그는 술에 빠져 들어간다.
명성을 얻고도 6년간 그는 글을 쓰지 못했다.
그 기간 동안 그가 미리 써놓은 작품들이 출간되기 시작하고 그것으로 그는 연명해갔다.

겉보기에는 여태까지의
카버 생애 가운데 정점에 도달해 있는 이 시점에서 카버는 내리막길로 들어서게 된다. 작품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이 첫째 이유이고, 술이 두 번째
이유였다. 그리고 그 둘은 결국 하나였다.
그러나.
카버는 모든 걸 잃고 다시 재기한다.
가족도 해체되고 메리앤도 떠나고 친구들도 떠났지만 카버는 다시 일어선다.
스스로를 져버리지 않을 자존심이 그에게 있었던 거 같다.
그를 세상에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리시는 악랄한 편집으로 새로운 카버를 만들어냈지만
카버의 정체성도 함께 난도질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카버가 묵인했던 건 어떤 이유였을까?
아마도.
그렇게라도 자신을 입지를 굳혀 놓고 더 커다란 사람이 되어 다시는 그런 일들이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 이후 [대성당]을 내놓고 카버는 리시의 편집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가벼운 카버에서 깊이 있고, 풍부한 카버로 자신을 되찾았다.
가난과 술, 해체된 가족.
자신의 작품마다 자신과 주변의 이야기를 남겨 두었던 카버의 작품이야말로 가장 진솔한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자신의 주변에서 이야깃거리를 찾아서 그것을 거의 그대로 재현해 내는 그의 솜씨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작가에 대해 알고 그의 작품을 대하면 모르고 읽었을 때 보다 훨씬 더 많은 감정을 느낄 거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단편들로 이루어진 카버의 생애를 알아가는 시간에 대한 기대감이 있는 글이었다.
한 사람에 대해 쓰기 위해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이 멋진 여정에 나도 동참한 것이 기뻤던 시간이었다.
레이먼드 카버를 읽는 시간은...
어쨌거나, 이번 생에서
원하던 걸
얻긴
했나?
그랬지.
그게
뭐였지?
내가 사랑받은
인간이었다고 스스로를 일컫는 것, 내가
이 지상에서 사랑받았다고
느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