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병에 걸려 돌아가신 할머니의 실체는 독립운동을 하던 할아버지와 그 동지를 팔아먹고 일본 순사와 바람나 쌍둥이 남매를 버리고 도망간 매정한 여인네였다.
그리고 67년 만에 할머니가 찾아왔다.
그 할머니의 실체는 60억이었다.
코믹하게 전개되는 이야기의 뒤끝은 깔깔하다.
웃픈 이야기라는 말이 왠지 약하게 느껴진다.
끝순이이자 제닌.
네 명의 남편 중 세 명의 폭력을 피해 달아나고 달아나야만 했던 끝순이이자 제니.
그녀는 마지막 남자에게서 편안함을 느끼고 그와 함께 한 세월 속에서 비로소 행복을 느꼈지만
두고 온 쌍둥이 남매에 대한 아픔은 세월 속에 켜켜히 쌓여만 갔다.
독립운동가이자 부여 명문가 최씨 집안의 장남인 할아버지와 진보 시대의 일꾼이자 노동자의 친구를 자처하는 금배지가 꿈인 아버지 사이에서 입사 시험 88 연속 낙방으로 10년간의 백수 생활을 통해 스스로 벌레로 전락해 버린 아들.
이 최 씨 집안 삼대에겐 누명을 쓰고 도망을 갈 수밖에 없었던 할머니 끝순과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어머니, 그리고 이혼으로 받은 빌딩마저 집을 위해 저당 잡히고 새로운 삶을 꿈꾸는 여동생 동주가 있다.
돈으로 무엇이든 다 되는 세상이라지만 이 뜬금없는 60억 앞에서 서로의 민낯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사람들을 읽어가며 사는 게 참 노곤하단 생각을 해본다.
남자들은 하나같이 무능하고, 그 무능을 폭력으로 메꾸며 자신의 여자들에 의지하며 살아내는 그들은 동석이가 스스로 벌레라고 지칭하는 그 모습들이 아닐까.
자신의 꿈을 위해 가족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아는 남자들 틈에서 자신들을 희생하며 삶을 묵묵히 견디어 내는 여자들은 그 어디에서도 대접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끝순 할매의 60억이 내게는 달콤함과 씁쓸함을 동시에 맛보게 해준다.
그나저나 60억은 정말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