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가 돌아왔다
김범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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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억 이후, 집안은 비로소 화해와 용서, 잃어버린 67년, 감동의 대 서사시가 엄숙하게 전개되었다. 할머니 표정에 그 감동과 희열이 역력했다. 60억 이전, 할머니의 기괴한 모습들은 아마도 긴장과 공포, 불안과 어색함이 만들어낸 갑옷이나 방패 같은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염병에 걸려 돌아가신 할머니의 실체는 독립운동을 하던 할아버지와 그 동지를 팔아먹고 일본 순사와 바람나 쌍둥이 남매를 버리고 도망간 매정한 여인네였다.

그리고 67년 만에 할머니가 찾아왔다.

그 할머니의 실체는 60억이었다.

 

코믹하게 전개되는 이야기의 뒤끝은 깔깔하다.

웃픈 이야기라는 말이 왠지 약하게 느껴진다.

끝순이이자 제닌.

네 명의 남편 중 세 명의 폭력을 피해 달아나고 달아나야만 했던 끝순이이자 제니.

그녀는 마지막 남자에게서 편안함을 느끼고 그와 함께 한 세월 속에서 비로소 행복을 느꼈지만

두고 온 쌍둥이 남매에 대한 아픔은 세월 속에 켜켜히 쌓여만 갔다.

 

독립운동가이자 부여 명문가 최씨 집안의 장남인 할아버지와 진보 시대의 일꾼이자 노동자의 친구를 자처하는 금배지가 꿈인 아버지 사이에서 입사 시험 88 연속 낙방으로 10년간의 백수 생활을 통해 스스로 벌레로 전락해 버린 아들.

이 최 씨 집안 삼대에겐 누명을 쓰고 도망을 갈 수밖에 없었던 할머니 끝순과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어머니, 그리고 이혼으로 받은 빌딩마저 집을 위해 저당 잡히고 새로운 삶을 꿈꾸는 여동생 동주가 있다.

 

돈으로 무엇이든 다 되는 세상이라지만 이 뜬금없는 60억 앞에서 서로의 민낯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사람들을 읽어가며 사는 게 참 노곤하단 생각을 해본다.

남자들은 하나같이 무능하고, 그 무능을 폭력으로 메꾸며 자신의 여자들에 의지하며 살아내는 그들은 동석이가 스스로 벌레라고 지칭하는 그 모습들이 아닐까.

자신의 꿈을 위해 가족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아는 남자들 틈에서 자신들을 희생하며 삶을 묵묵히 견디어 내는 여자들은 그 어디에서도 대접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끝순 할매의 60억이 내게는 달콤함과 씁쓸함을 동시에 맛보게 해준다.

 

그나저나 60억은 정말 있는 걸까?

 

가장 어려울 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순간 말이다. 사람들에겐 그런 순간이 찾아 온단다. 그때 사람들은 무서워서 진실보다는 거짓을 찾게 되지. 내가 그랬어. 정말 맷돌로 갈아버리더라도, 끓는 물에 삶아 버리더라도 네 할아비를 기다리고 진실을 얘기해야 했어. 그런데 난 도망쳤지. 그게 그땐 최선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최악이었어. 피할 수 없는 길을 피하면 그 대가를 아주 오래도록 치러야 한다.

 

할머니는 오래전 누명을 벗었지만 결코 고향땅을 밟지 못했다.

그들이 그 오랜 세월 그 땅을 딛고 산 그들이 그녀를 용납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아들딸도, 며느리도 손주들도 그녀를 위해 그들을 이해시키지 못했다.

 

굳어진 마음의 벽은 진실 앞에서도 굳건한 법이니까.

 

긴장을 하면, 위험이 닥치면, 남자는 폭력을 생각하고 여자는 비상을 생각한다.

그래서 남자는 누군가를 때리고 여자는 마음속으로 하늘을 난다.

 

사랑하는 여자를 친구에게 빼앗기고 그럼에도 계속 친구에게 빌붙어 술을 얻어먹는 동석의 삶.

아직도 잊지 못하는 그 여자가 친구의 손에 멍들어 감을 알았을 때도 동석은 단지 무릎을 꿇었을 뿐이다.

이 정말 비루해 보이는 화자이자 최 씨 집안의 삼대째인 동석은 그들 중에 처음으로 할머니에게 마음을 연 장본인이다.

오랜 세월 눈칫밥을 먹어 본 자의 혜안이라고나 할까?

자신이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무얼 잘 하는지 알지 못한 채로 떠나간 연인을 그리며 피시방에서 고스톱이나 치며 세월을 보냈던 동석은 할머니를 통해 자신의 잊어버렸던 꿈을 되찾는다.

 

이 피는 물보다 진한 이야기를 읽는 내내 웃었고, 찡했다.

정끝순 여사의 화려한 귀환은 그동안 돌아오고 싶었지만 돌아올 수 없었던 그녀들의 대리 귀환이었다.

그래서 그 60억이 주는 아우라가 더없이 귀중했다.

 

그것이 진실이든, 뻥이든.

그것이라도 없었으면 정끝순은 그저 제니로 밖에는 남지 못했을 테니.

 

다 원수야, 모두 원수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 짐이야.

 

동주의 외침이 메아리치지만

가족은 그렇게 서로에게 짐이 된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짐이라고 생각한 그들에게 나 역시 짐이었음을.

그러니 이제라도 사랑하자. 은근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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