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방문자들 - 테마소설 페미니즘 다산책방 테마소설
장류진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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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남 오빠에게 그 이후 그녀들의 이야기는 달라진 게 있을까?

페미니즘.

우리가 늘 쓰고 있지만 정말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알지 못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이 책엔 6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새벽의 방문자들 - 장류진

룰루와 랄라 ㅡ 하유지

베이비 그루피 ㅡ 정지향

예의 바른 악당 ㅡ 박민정

유미의 기분 ㅡ 김 현

누구세요? ㅡ 김현진

새벽마다 초인종을 누르는 낯선 남자들.

그 남자들의 사진을 찍어 벽에 붙여 놓고 간략한 인상과 점수를 매겨 넣는 여자.

그녀 혼자 사는 오피스텔은 예전에 누가 살았는지 모를 사람들의 흔적이 새벽에 초인종을 누른다.

새벽의 방문자들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찾아왔다. 여자는 초인종이 울릴 때마다 비디오 폰에 달린 모니터로 남자들을 관찰했다. 그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별일 아니라고 주문을 거는 듯한 태연함, 남에게 들키기 싫은 일을 할 때의 부끄러움, 돌연 술이 확 깨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의 주저함, 그러면서도 어쨌든 곧 벌어지게 될 눈먼 섹스에 대한 설렘들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 얼굴들.

 

 

모두가 잠들어 있어야 할 새벽에 잠들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그녀의 밤은 늘 조마조마하다.

두려움이 호기심으로, 호기심이 관찰로 변했던 그 좁은 공간.

다른 동 같은 호수의 그녀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는 걸 그녀는 알게 된다.

그리고 헤어졌던 그 남자도 새벽에 초인종을 울린다.

섹스를 돈으로 사는 남자들의 머그샷을 두고 그녀는 이사를 간다.

룰루가 손으로 가리킨 그곳엔 금연 푯말이 있었다.

무신경한 흡연자에게 향한 룰루의 가냘픈 손짓엔 말보다 더한 감정이 흐른다.

버스 정류장에서 두 여자는 친구가 되었다.

오며 가며 마주치던 시선이 하필 버스 정류장에서 이야기를 하게 됐을까?

떠나고, 돌아오는 곳. 버스 정류장.

어느 버스를 타게 될지 안다고 생각하지만 절대 알 수 없는 그곳.

마음의 고달픔을 털어내고 서로의 기억이 되어 주었던 그곳에 룰루와 함께 랄라를 기억하는 그녀가 있었다.

우리가 만나는 동안 P는 콘돔을 사용하지 않았다. 몇 번인가 더 섹스를 한 뒤 슬며시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는 한 번도 콘돔을 사용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 사이 내 24인치 캐리어에는 임신테스트기가 늘어갔다.

 

 

베이비 그루피.

무책임한 남자. 가 아닌 어른.

초와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때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서로의 상처를 내뱉은 그날에야 비로소 서로 마주 보며 웃을 수 있었다.

어린 마음을 후려친 그 남자 어른들은 '내 친구들도 그렇게 해왔고 아무 일도 없었던' 그 일에 대해 일말의 양심도 갖지 않았을 것이다.

보라는 피해자일까? 가해자일까?

누가 예의 바른 악당일까?

나는 아직도 그 이야기의 핵심을 알지 못하겠다. 진심으로.

형석은 사과할 자격을 잃어버리지 않는 인간이야말로 자신을 만만히 여기지 않는 이라고 생각했고, 승우는 사과하지 못했다는 것을 평생 기억하는 인간이야말로 누군가를 만만하게 여기지 않는 이라고 생각했다.

 

 

진지한 유미.

자신은 공정한 선생이라는 명제가 머릿속에 박힌 형석에게 사과란 왜? 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문제다.

그가 위키디피아까지 들먹여 가며 내뱉은 사과에 웃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학교에서 무분별하게 가해지는 성희롱과 언어폭력.

너무나 일반화되어서 그게 문제일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선생들과 남학생들.

여학생들은 그저 그렇게 웃고 넘겨야만 할까?

유미처럼 웃지 않고 손을 들어 한마디를 하면 안 되는 걸까?

아직도 되풀이되고 있는 이 입담들 앞에서 유미의 기분이 온전히 느껴져서 형석의 웃고픈 사과까지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싶은 이 마음이 비단 나뿐일까?

누구세요?

묻고 싶다.

익히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 주변의 남자들에게 누구냐고.

나라고 알고 있던 나에게 묻고 싶다.

넌 정말 너로 살고 있냐고.

마지막 이야기 누구세요? 는

남자와 여자가 잠시 바뀌었을 뿐이다.

근데 왜 이리 자극적인 걸까?

왜 이리 통쾌한 걸까?

왜 이리 웃음이 나는 걸까?

그리고 왜 죄지었다는 느낌이 안 드는 걸까?

6편의 이야기는 한숨을 쉬게 한다.

매 이야기마다 새로운 주인공을 만나게 되지만 모두 내가 아는 사람들이다.

현남 오빠에게.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는 못다 한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것을 사실 그대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일 뿐이다.

페미니즘이란 단어에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도 이 짧은 단편들을 읽어 보라 권하고 싶다.

여기엔 우리가 일상에서 스치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지어낸 이야기지만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심코. 늘 그래왔듯이. 언제나처럼. 무분별하게. 의식하지 못하고. 그게 왜? 어때서? 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

누군가의 상처를 아무렇지 않게 후벼 판 일이기도 하다는걸.

누군가에게 마구잡이로 상처를 주었다는 뜻이기도 하다는걸.

배워가자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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