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소설이라기에는 너무 진지한 문체다.
마치 문학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스파이 소설을 정독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로잘리 크넥트는 마치 50년대에서 시간을 거슬러 온 사람 같다.
그 시대를 관통한 사람에게서 나올법한 문체로 베라와 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제목이 베라 켈리는 누구인가? 였나 보다.
베라 켈리라는 레즈비언의 독특한 이력에 대한 이야기였다.
다른 이름으로 살면서 사회에서 격리당하고 조직에서 버림받을 것을 걱정했던 소심하고 여린 베라가
앤이 되어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자신을 바꿔가며 노력한 흔적들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그럼에도 앤으로서 살았던 아르헨티나에서의 모험은 그녀가 진정한 베라로 돌아올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자신은 스스로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마지막 딜은 그녀를 쓸모 있을 때까지만 이용하려는 조직에게 받아낼 수 있는 최대한이었다.
그녀의 이용 가치가 높아지도록 그녀 스스로 몸값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그녀가 스스로 탈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베라 켈리로 돌아온 그녀의 삶이 전과는 같지 않겠지만
조용히 베라로 살 거라 생각했겠지만
이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는 게 조금 서운하다.
왜냐하면 베라는 제임스 본드 같은 스파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아무도 의심할 수 없는 그저 소심하고, 어딘가 독특하지만 수줍음으로 그것을 메워버리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언젠가는 증명하고픈 욕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걸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야기가 베라의 첫 번째 이야기였기를 바란다.
진정한 자아를 찾은 사람만이 어떠한 모험 앞에서도 초연해질 수 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