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해의 방 - 2019 한경신춘문예 당선작
진유라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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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잃는다는 건 시간 감각을 잃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시간과 함께했던 그 모든 사건을 잃는다. 잊는 게 아니라 잃는다. 마치 검은 구멍 속으로 시간이 쑥 빠져서 어디론가 흘러가는 것처럼, 잃는다. 점점 시간에 대한 감각이 둔해지다가, 앞뒤가 없는 시간속을 떠돌게 되고, 그러다 영원히 시간 속의 미아가 되는 것이 치매 환자들이었다.

 

 

 

탈북자 무해에겐 4년 전 위암으로 죽은 남편과 하나뿐인 딸 모래.

그리고 친구 영주가 있다.

탈북자란 신분을 숨기고 살았던 무해에게 어느 날 병이 찾아온다.

초로기 치매라는 이름으로.

 

 

무해의 병은 매일 조금씩 구체적인 얼굴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집요했고, 은밀했으며, 야만스러웠다.

 

 

 

 

알 수 없는 길에 대한 이야기이자.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이야기다.

치매라는 병도

탈북자라는 신분도

아무나 쉽게 알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늙음과 죽음을 배운 자만이 인생의 절정을 배울 수 있다.

 

 

 

점점 기억을 읽어갈 무해는 모래를 위해 기록을 남기기로 한다.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과거의 기억에 대한 기록.

혜산.

무해의 고향 압록강 어귀에서 바라보던 창바이는 빛의 도시였다.

그곳에서 바람을 타고 넘어오는 냄새는 굶주린 혜산 사람들을 강으로 이끌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강을 건너는 사람들 속에 무해도 있었다.

대기근으로 사람들이 속절없이 죽어나가는 혜산의 풍경이 손에 잡힐 듯이 그려져 있다.

가보지 못한 곳.

가볼 수 없는 곳에 대한 묘사가 소름 돋게 한다.

무사히 강을 건넜지만 무해에게 무해한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혜산 보다 더 깡촌으로 팔려간 무해는 다리 없는 남편 대신 고달픈 농사일을 떠맡아야 했다.

아들이 아닌 딸을 낳은 무해는 그 아이의 앞날에 자신이 설자리가 없다는 걸 깨닫고 탈출한다.

카스테라의 달콤한 내음을 담고 있는 아이를 남겨두고.

 

늙기도 전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어버린 그녀는 누구나 쉽고 당연하게 노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반인들과는 달리, 노인이 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무사히 행운이 지속되어야만 노인이 된다고 생각했다.

 

치매는 무해를 급격히 늙게 만들었다.

기억의 어귀에서 멀건 눈으로 헤메이는 무해를 보며 이제 갓 대학생이 된 모래는 두려워진다.

무해의 방.

이곳엔 우리가 가보지 않은 곳과 갈 수 없는 곳이 존재한다.

환영처럼.

무해를 통해 나는 그 길을 미리 가 보았다.

해맑은 정신으로 온전히 나이 들어간다는 자체를 당연시 여기고 있었는데

어쩌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무해처럼 갑자기. 한순간에. 인지하지도 못한 채로. 그렇게.

2019년 한경 신춘문예 장편소설 당선작이다.

가까지만 절대 갈 수 없는 나라의 사람이었던 그녀 무해.

언제든 코밑으로 은밀하게 스며들어 기억을 갉아먹을 수 있는 기생충 같은 치매.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조합이었는데 마치 잘 알고 있는 이야기처럼 써 내려간 글들이 사무치게 절절하다.

무심한듯한 글 속에 담긴 무심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읽고 있을 때 보다 읽고 나서 더욱 마음에 스며든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무해는 이제 살아온 인생과 전혀 다른 인생 계획을 세워야 했다. 상상하지 않았던 삶. 기정사실화된 삶. 순식간에 모든 것이 정해져버렸다. 꿈꿀 수 있는 가능성을 사라졌다. 나를 지킬 수 있을까?

아무것도 지킬 수 없는 삶을 살아내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무해는 잊어 가겠지만

모래는 고스란히 기억하게 될 시간들.

 

병은.

남겨진 사람들에게 요란한 파편을 남겨두고 사라진다.

삶을 살면서 가장 잘 준비해야 하는 일이 죽음인 거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노인이 된다는 것이

이렇게나 어려운 거라는 걸 여지껏 생각해 보지 못했다.

무해와 함께 미리 체험한 것들을 깊이 되새기며 살아야겠다.

결국 삶에 대해 겸손한 마음만이 행복한 죽음을 가져올 테니 말이다.

 

 

여운이 남아서 자꾸 뒤돌아 보는 이별처럼

나는

무해의 방에서 걸어 나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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