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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화가다 - 페미니즘 미술관
정일영 지음 / 아마존의나비 / 2019년 5월
평점 :
10년 넘게 그림에 빠져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점들을 만난 것입니다. 어렴풋하게나마 남자가 보는 그림이 아닌, 여자의 몸이 되어 그림이 되는 것의 느낌을 상상해보았지요. 치욕적이고 수치스러우며 분노할 만한 그림들. 명화로 칭송받는, 내가 좋아했던 꽤 많은 그림들마저 그러했습니다. 그림 속 여성 모델은 훈계의 대상이었고 관음과 성적 욕망의 대상이었으며 거래의 대상이었습니다. 내가 즐기고 찬미하는 예술이 누군가에겐 모욕이고 수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습니다.
1부 그리는 여성, 내가 화가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서의 그녀들에 대한 이야기는 첫 장부터 눈길을 끈다.
프리다 칼로. 영화로 먼저 알게 된 프리다의 이야기는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녀의 삶 자체도 그렇지만 그녀의 그림들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느낌들은 시간이 지난 후에도 쉽사리 떨치기 힘들었다.
1부에서 화가로서의 여성들은 서로 비슷하거나, 서로 다르거나로 비교되어 이야기된다.
그녀들은 어떤 역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갔다.
평가절하되고, 혹평을 받고, 무시당하고, 냉대 받아도 자신의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중세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여성 화가들은 주로 가족의 공방에서 허드렛일을 맡거나 남성 화가의 조수를 하며 붓을 잡았다. 특별한 재능으로 훌륭한 그림을 완성한들 최종 서명은 아버지나 남자 스승의 몫이었다. 극소수 운 좋은 여성 화가만이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얼마나 많은 그림들이 남자의 이름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까?이 책의 표지 그림만 보아도 30여 년이 넘도록 미술관에 전시되어 찬사를 받은 작품이었다.
프랑스 신고전주의 거장 자크 루이 다비드의 작품으로.
그러나 이 그림이 마리 드니즈 빌레르라는 무명의 여성화가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마자 그림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폄훼되었다.
여성의 이미지를 추하게 표현함으로써 '여성을 혐오한다'는 혐의를 받는 드가는 의외로 여성 화가들의 진출을 격려하고 후원했다. 반면 르누아르는 여성의 사회 진출을 싫어했다. 전문직 여성에 대한 반감은 극에 달했다.
여성을 아름답게 그려낸 르누아르가 여성을 차별하는 사람이었다니, 앞으로 르누아르의 그림 속 여성들에 대한 느낌이 달라질 거 같다.
하긴. 그림이나 사진이나 아름다운 모습 이면에 어떠한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드가의 그림은 현실적이고 사실적일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 미화되지 않은.
그림이 많은 남성들의 관음증을 충족시켜주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씁쓸해진다.
그래서 아름답고 관능적인 여인들이 표현된 그림들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해야만 할 거 같다.
모델과 관계를 갖는 것은 오랜 세월 남성 화가들에게는 공공연한 일로 간주되었으나, 여성 화가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위험하고 부도덕한 행위였다. 그러나 렘피카는 별 주저 없이 관습에 도발했고 욕망을 따랐다.
램피카라는 여성 화가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림이 지금 보아도 세련되고 감각적이다.
그녀는 자신의 재능을 살려 부를 거머쥐는 데 인맥을 동원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다.
많은 여성들이 남편에게 의지하는 삶을 살았지만 그녀는 오히려 남편 대신 생계를 위해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위험도 감수할 만큼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
2부. 그려진 여성. 내가 주인공이다.
지난달에 읽은 그리스 신화에서 나는 그저 글만 읽었던 모양이다.
이 책의 후반부는 그리스 신화를 그린 그림들에 대해 다뤘다.
신화가 고대부터 가부장제를 강화하고, 여성들의 지위를 낮추는 의미로 해석되었다니 그리고 그것을 그림으로 찬란하게 표현했다니 모르고 보고, 읽었을 땐 재미있던 것들이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니 비참하게 느껴진다.
여성편력이 황당하리만큼 왕성했던 제우스.
그의 불륜을 눈감아주지 않고 처단했던 헤라.
하지만 헤라가 벌을 준 건 제우스가 아니라 제우스로 인해 피해를 봤던 여성들이었다.
피해자임에도 벌을 받아야만 했다. 지금 이 현실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가해자 제우스는 언제나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헤라에게 자신이 피해 입힌 여성들을 넘겼다.
이것 또한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고대부터 신화에서부터 가해자는 자유를 누리고 피해자는 벌을 받았다.
늘 그래왔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페미니즘 미술연구의 가장 큰 성과는 잊힌 여성 화가들을 발굴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에는 어쩔 수 없이 그녀들의 예술을 페미니즘의 잣대로 편협하게 만드는 위험도 따른다.
작가의 말처럼 페미니즘이라는 잣대로 모처럼 얻은 시선의 자유를 편협하게 만드는 건 사양한다.
다만 이 책을 통해 그림을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알지 못했던 많은 여성 화가들과 그녀들의 그림을 조금 '맛'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앞으로 그림을 볼 때 단순하게 아름답다, 예쁘다는 감탄사로 감상하지는 않을 거 같다.
그림에 숨겨진 또 다른 시선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늘어 갔으면 좋겠다.
다양한 시선이 다양한 사람들을 아우르고, 그 아우름의 힘이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을 가져다줌으로.
고정된 시선으로 너무 오랜 시간을 버텨왔다.
새로운 시선으로 앞으로의 시간을 바라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