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묻다 시와서 산문선
나쓰메 소세키 외 지음, 박성민 옮김 / 시와서 / 201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시집처럼 단아한 산문집이다.

일본 근, 현대 작가들의 수필집으로 스물일곱 명의 작가들에게서 추려낸 30편의 글들이 모여있는 책이다.

소설과 달리 수필은 작가의 꾸미지 않은 모습이 담겨 있어 뭔가 더 친근한 느낌이다.

 

글을 팔아서 입에 풀칠을 해도 좋다. 하지만 글을 사는 쪽은 장사꾼이다. 일일이 주문하는 대로 떠맡다가는 배겨 낼 수가 없다. 가난 때문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삼가야 할 것은 글을 함부로 많이 쓰는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에게 한 말이다.

이 산문집엔 소세키의 글도 담겼지만 그를 추억하는 이들의 글도 여러 편 담겨 있다.

이제 막 알려지기 시작하는 후배 겸 제자에게 진심 어린 충고를 해주는 소세키의 말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새겨야 하는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두 번째 강진이 또 일어나 나는 굴러 넘어지듯이 계단을 내려가 다시 문기둥을 잡았다. 그게 그치자, 시간을 좀 두고 세 번째, 네 번째 여진이 이어졌다. A씨 집 지붕 기와가 와르르 흔들리며 무너졌다. 골목길 모퉁이에 있는 당구장의 높은 지붕에서 쉴 새 없이 무너져 내리는 기와의 검은 그림자가 까마귀가 나는 듯 어지럽게 보였다.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오카모토 기도의 글은 간토 대지진이 났을 때 자신이 살던 마을이 전부 불타 버리는 경험을 썼다. 먼 곳에서 불꽃이 퍼지고 있었지만 바람의 방향이 이쪽에서 불어 가는 거라 괜찮을 거라 안심하던 마을 사람들이 얼마 안 되어 피난 짐을 싸게 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작가는 이 대지진 이후 불필요한 물건은 절대 사지 않았다 하니 미니멀 생활의 선구자였던 거 같다.

다자이 오사무의 술의 추억은 청주에 대한 오사무의 절절한 경험담을 알게 된다.

오사무의 글은 이 수필로 처음 '맛'을 보았는데 뭔가 술 취한 가운데 생경하게 정신이 말짱해지는 그런 상태에서 쓴 글 같은 느낌이 든다. 술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던 거 같다.

암튼 그의 술 부족을 적절하게 어루만져 준 마루야마라는 배우의 배려심에 더 눈길이 가는 이야기다.

 

프랑스 혁명은 지루함에서 일어난 것이니, 이것이 사회의 안녕에 가장 위험을 초래한다. 그래서 정치가는 사람들이 지루함을 못 느끼도록 끊임없이 새로운 사업을 벌이고, 내각을 경질하고, 문화를 퍼뜨리고, 여러 스포츠를 장려하고, 오락장이나 유곽, 공중 목욕탕을 설계한다.

 

 

병이 들어서야 지루함이 없어졌다 말하는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생각이 참 참신하다.

투병 중에 모든 관심사가 사라지고, 오로지 현재, 지금 들리는 소리나 보이는 것들에 더 마음이 가는 것을 이야기했다.

평소 사소하다고 생각해서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들이 아프면서 사무치게 다가오는 느낌을 적었다.

작가는 아픈 와중에도 종이에 쓰지 못하면 마음에 글을 쓰는 거 같다.

병상에서조차도 뭔가를 깨달아야 하니 말이다.

다자이 오사무, 나쓰메 소세끼의 글 보다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글은

시마지키 도손의 세 명의 방문객이다.

겨울

가난

늙음

이 세 명의 방문객에 대한 도손의 글은 자꾸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리고 문밖에서 서성이는 아직 찾아오지 않은 방문객 '죽음'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말한다.

 

아마 '죽음' 또한 내가 생각지도 못한 것을 가르쳐줄지도 모른다.

 

김사량.

이 산문집을 통해 알게 되었다.

재일 조선인 문학의 선구적 존재로 여겨진다.

글에서 고향과 가족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전하고 있다.

남의 나라에서 고국의 하늘을 그리는 마음은 어떤 걸까?

 

 

 

 

조선의 하늘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고 할 만큼, 푸르고 활짝 개어 있다. 어서 그 아래를 걷고 싶은 마음이 요즘 들기 시작하면서 참을 수 없을 만큼 그립다. 이렇게 나는 언제나 조선과 일본 사이를 철새처럼 왔다갔다하겠지.

 

꽃을 묻다.

제목과 같은 제목의 수필이 처음에 실려있다.

꽃 무덤과는 다른 꽃을 묻는 놀이.

이렇게 창의적으로 놀 줄 알았던 그들의 삶이 어땠을까를 잠시 생각해 본다.

MSG가 빠진 음식은 처음엔 아무 맛을 못 느끼지만 자꾸 먹다 보면 본연의 '맛'을 알게 된다.

화려하고, 속도감 있고, 몰입감 있고,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이야기들만 읽다가 담백한 맛을 읽게 되니 머리가 청아해지는 느낌이다.

욕심 없는 글들이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단아한 글들이 생각을 정리케하고

소소한 글들이 미소를 짓게 한다.

작지만 큰 책이다.

전부 모르는 작가들이었고, 전부 처음 읽는 글들이었다.

이름만 알았던 작가들의 글을 만나게 되어서 좋았다.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지어냈던 이제 나는 그들의 본질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은 꽃을 묻듯이 그들의 이야기도 함께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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