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제본사
브리짓 콜린스 지음, 공민희 옮김 / 청미래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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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아니라, 에밋. 우리는 그들의 기억을 가져와서 제본하는 거야. 사람들이 담고 있을 수 없는 것들. 가지고는 살아갈 수 없는 것들 말이지. 우리는 그 기억을 가져와서 더는 해를 끼치지 못하는 곳에 둔단다. 그게 책이란다.

 

 

기억을 제본하는 제본사.

제목만으로 나는 판타지를 상상했다. 뻔하게도.

누군가의 읽어서는 안되는 기억을 읽어버려서 생겨나는 온갖 문제들을 가열차게 해결해가는.

 

에밋 파머.

건강하던 그가 이유 없이 아프고 병이 나서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된다.

부모는 에밋을 근처의 제본사의 도제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에밋은 가기 싫었지만 자신의 허약한 몸이, 그리고 제본사가 될 운명이라는 부모님의 말에 숲속의 마녀로 불리는 제본사 세레디스의 도제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세레디스는 아직 때가 안되었다는 말만 하고, 간단한 일들만 시킬 뿐 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하루하루 고통스러운 정신을 이끌고 간단한 작업만을 하던 어느 날.

젊은 남자가 그곳을 찾아온다.

그를 보는 순간 섬뜩하면서도 알 수 없는 증오심과 두려움과 짜릿함이 에밋을 당황하게 만든다.

본적 없지만 왠지 아는 거 같은 그 남자.

 

 

이 이야기를 단순하게 생각했던 나는 어느 지점에서 뒤통수를 맞게 된다.

이 책은.

단순하지 않다.

신비롭고, 아름답고, 아련하며,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책에 쏟아진 찬사들에 대해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이해했다.

 

 

제본사의 열병. 악몽과 질환. 드 하빌랜드는 그것이 제본에서 비롯되는 병이라고 했다. 그 말이 이해가 갔다. 나는 제본을 당해서 아팠던 것이다. 세레디스가 나를 제본했을 때 완전히 낫지 않았고 그래서 반쯤 미쳤던 것이다.

 

 

자신에게 정신병이 있다고 생각했던 에밋은 어느 날 자신의 이름이 적힌 책을 발견한다.

제본사의 열병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병이 사실은 제본을 당해서 생긴 병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는 무엇 때문에 제본을 당했을까?

도대체 어떤 기억을 잊고 싶었던 것일까?

무엇이 그를 그토록 미치게 만들었을까?

 

 

이 이야기는 3부작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각 단계마다 시점이 바뀐다.

에밋과 루시안의 시점으로.

 

 

청소년 소설을 주로 써왔던 작가의 첫 번째 성인 소설이다.

문체가 상당히 정교하고 아름답다.

보통의 내공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제본당한 소년들.

제본당한 하녀들.

제본당한 사람들.

그들의 기억이 담겨 있는 책들을 사고파는 사람들.

제본한 책은 은밀히 보관되어야 하지만 그 은밀한 기억들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권력을 쥐고, 재력을 가진.

겉으로는 신사의 모습으로 우아하고 근엄한 자태를 지니지만 그 겉모습 안엔 천박하고, 잔인하고, 욕망으로 가득 찬 짐승 같은 군상들이 있다.

그들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한 드 하빌랜드 같은 제본사가 있고, 그들의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약속을 지키는 세레디스가 있었다.

 

 

하지만 그 세계를 알지 못했던 시골 청년 에밋과 그 세계에서의 천박함에 치를 떨었던 루시안.

이 둘에게 벌어졌던 일은 어떤 것이었을까?

무엇이 그들을 제본당하게 만들었을까?

 

 

책을 읽어감에도, 책을 끝내고도, 특별한 책을 만났다는 생각으로 설렜다.

사람의 기억 속에서 고통스럽고, 잊고 싶은 기억들을 제본해서 책으로 만든다는 설정도 새로웠지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욕망의 민낯들도 새롭게 다가왔다.

그리고 지독한 사랑도.

 

 

아름다운 표지만큼 이야기도 아름다웠다.

 

 

비릿한 사랑의 내음과 차가운 열정.

비뚤어진 욕망을 제본으로 지워버리고 계속 자신의 욕망을 채워가는 구역질 나는 신사도.

자신의 일에 책임감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운명.

신분 상승에 대한 욕망을 사랑으로 포장시킨 욕심.

금지된 사랑에 대한 용기.

가장 사랑하고, 가장 가까운 사람에 대한 질투.

용납할 수 없었던 것들...

 

 

복합적인 이야기를 다뤘음에도 전혀 군더더기가 없다.

시점이 바뀌고 배경이 달라져도 어색함이 없다.

압도적이지 않은 문체인데 압도 당하게 된다.

 

 

아마도 올해 내가 읽은 책들과 읽을 책들 중

세 손가락 안에 들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고만고만한 이야기에 지친 당신

색다른 이야기를 찾는 당신

푹 빠져서 읽을 무언가를 찾는 당신

그리고 열려있는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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