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의 등산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1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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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야말로 원래의 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장소다.

 

 

하나의 산봉우리에 이야기 하나.

저마다 산을 오르는 여자들이 지닌 현실은 서로 다르지만 그만큼 서로 비슷하다.

결혼 적령기를 지난 여자

불륜을 저지른 여자

결혼의 기로에 서 있는 여자

이혼을 앞둔 여자

전공과는 상관없는 일을 시작한 여자

마흔에 단체 만남에서 만난 남자와 산에 온 여자

 

등산을 잘 하는 여자

산을 처음 오르는 여자

산에 오른지 오래된 여자

혼자인 게 좋은 여자

혼자는 불안한 여자

과거를 회상하는 여자

미래를 꿈꾸는 여자

 

제각각의 여자들의 이야기가 산 하나와 연결되어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딘다.

이야기 따라 나도 같이 산에 오른다.

미덥잖은 동료가 의외의 궁합으로 친구가 되고

집안 행사 때면 비가 오는 자매들의 산행에도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여유를 가질 수 없는 것이야말로 미숙하다는 증거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상징인 야리가타케 정상에 거절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 혼자 힘으로라도 생각했던 건 사실은 자신의 페이스를 맞춰주었던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힘들어할 때마다 고비를 넘길 수 있도록 길잡이를 해주었던 아버지가 있었다는 걸 깨달은 순간.

 

몇 번을 오르고자 했던 산은 번번이 그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것이 항상 다른 사람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이었다.

다른 사람이 발목을 잡은 게 아니었다. 스스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창에 발이 미끄러져 균형을 잃었다. 이 산길은 내 인생인가, 아니면 언니 눈에 비친 내 인생인가. 길이 질척거리는 데다 높게 죽죽 뻗어 있었을 나무들이 여기 와서 마구잡이로 구부러져 길을 막고 있는 것 같다.

 

 

 

일찍 결혼한 언니 덕에 양파 농사를 짓는 부모님을 돕기 위해 시골로 내려온 나.

하지만 사람들 눈에 그녀는 나이 먹었음에도 시집도 안 가고 취직도 안 하고 아버지 연금에 빌붙어 사는 한심한 여자이다.

자매의 산행은 언니의 잔소리로 막을 내릴 거 같았지만, 언니에겐 언니만의 문제가 있었다.

 

 

사람은 크든 작든 짐을 지고 있다. 단, 그 짐은 옆에서 보면 내려놓으면 될 것 같지만 그 사람에게는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오히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아는 얼굴들을 만나게 된다.

저 이야기의 주인공이 이 이야기의 조연으로 출연한다.

이 이야기에서 잠깐 언급되었던 그녀는 다음 이야기에 출연한다.

끊어진 거 같았던 이야기들이 서로서로 연결되어 이어진다.

 

신선하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더 그렇다.

이번엔 누가 등장할까?를 생각하며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그리고 그녀들은 모두 알게 모르게 연결되어 있다.

여자들의 등산일기로.

여자들의 등산일기는 그녀들을 묶어주는 매개체이다.

등산 사이트에서 얻은 정보로 산을 오르는 그녀들은 알게 모르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서로 알던 서로 모르던

 

여전히 내겐 일본 이름들이 낯설고 머리에 입력이 되지 않아서 힘들지만

이 책에서 만나는 인물들은 곳곳에 그 흔적들을 교묘하게 흘려 놓아서 첫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이 결국 마지막까지 함께 하는 느낌이다.

그 와중에 그녀들은 결혼을 했거나, 결혼을 앞둔 방식으로 등장하여 깨알 같은 재미를 준다.

쪼개진 단편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엮어가다니 새삼 더 재미를 느끼게 만드는 힘이 있다.

 

가나에의 소설은 고백 이후에 두 번째인데 확연히 다른 것 같으면서도 비슷한 맥락이 엿보인다.

모든 관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읽으면서 생각했다. 가나에 선생은 정말 이 모든 산을 다 올라 본 걸까?

정상까지 오르면서 이 이야기를 구상했을까?

왠지 곳곳에 그녀의 흔적들이 보이는 거 같다.

마치 흔한 주변인 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작품 속에 등장해 있는 거 같다.

 

일본의 많은 소설들이 우리보다 앞서가는 세계를 보여주는 게 사실이긴 하지만

여자들의 이야기에서는 우리가 좀 더 앞서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이야기 속 주인공들에게서 느껴지는 건 아직도 결혼이란 관습에 묶여있고, 남자에게 의지해야 좋게 생각되는 모습들이 보여서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유즈키의 모자가 나는 제일 맘에 들었다.

 

내가 만든 모자는 내가 모르는 풍경을 볼 수 있다. 바쁜 매일매일에서 건져 올린 누군가의 자유로운 시간과 함께할 수 있다.

나도 슬슬 새로운 풍경을 잘라내러 가볼까.

 

 

산을 오르며 곤란을 겪는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저마다의 문제들을 산을 오르며 생각하고, 고민하고, 터뜨리고, 날려버린다.

정상에서 마주하는 풍경 너머로.

 

그녀들이 하나씩 쓰게 될 모자가

그녀들과 함께 자유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인생 어느 부분에서 문제에 부닥칠 때마다.

자유의 모자를 쓰시길.

그리고 같이 산에 오르길.

따로 또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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