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크는 이 이야기로 그 시대의 곧이곧대로의 표현력을
질타함으로써 다른 표현력을 통해 생명력을 불어넣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작가로서 그 당시 그림들을 보며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 지도
모른다.
입체감이 부족한 그림들이 그의 상상력을 방해했던
모양이다.
프렌호퍼는 그 부족한 상상력을 붓질 한 번으로 만회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림이 살아나는 과정을 표현해 내면서 발자크는 미래의 화풍을 글로써 표현해
내었다.?
어쩜 이 작품 이후의 그림들이 어느 화가에게 영감을 주었는지도
모르지.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보는
법이니까.
이름은 들었지만 잘 모르는 작가의 단편들이 엮어진 책을
읽으며
이 책을 소개하는 출판사가 많은 부분에서 독자들을 이해시키려 노력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실 책머리와 부록이 없었다면 이 미지의 걸작은 내게 그야말로 미지의 걸작으로 남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미술에 문외한인 내가 읽어도 이 작품에 이런 의미가 있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게 길을 잡아준 것이
바로 이 책의 묘미이자 출판사의 신의 한 수라 생각한다.
이 두 편의 이야기로 발자크를 알게 된
나는
발자크가 너무 앞선 시대를 산 게 아닌가
싶다.
요즘 세상을 살았다면 그는 아마도 다양한 곳에서 실력을 발휘하면서 자신의 감각들을 맘껏 펼쳐 볼 수
있었을 만능 엔터테이너가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