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수를 죽이고 - 환몽 컬렉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0
오쓰이치 외 지음, 김선영 옮김, 아다치 히로타카 / 비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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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단의 독보적인 천재 작가 오쓰이치.

그의 환몽 컬렉션 메리 수를 죽이고를 만났다.

글의 성격에 따라 필명을 달리하여 글을 쓰는 이 작가는 재밌게도 자신의 작품 해설도 다른 필명으로 짤막하게 달아 놓았다.

마치 내 속엔 내가 너무 많아~라고 외치는 거 같다.

다중 인격체의 집합체라고 해야 할까?

맨 처음 책을 받고는 옴니버스 형식의 단편집으로 생각했었다가 뒤통수 맞은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다양하지?

그렇게 작가에 대한 호기심을 안고 이 책을 읽게 되었다.

7편의 단편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일본판 환상특급이다.

그만큼 짧고 단순하면서도 강렬하다.


[사랑스러운 원숭이의 일기]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가 남긴 잉크병

쓰다만 잉크가 들어 있는 잉크병을 엄마로부터 택배로 받은 다카하시는 관처럼 황량한 방 안에 잉크병을 그대로 둘 수 없어 북앤드를 샀고, 그러자니 책을 꽂아야 할 거 같아서 책을 사고, 사 놨으니 읽어야 할 거 같아서 읽다 보니 책이 늘고, 수납을 위해 책장을 사고, 그러다 책상을 사고, 그러니 공부를 해야 할 거 같아서 공부를 하고...

잉크병 하나의 기적

약에 취해 학교도 빼먹고 자유분방하게 살던 다카하시는 아버지의 쓰다만 잉크병이 이렇게 놀라운 변화를 가져올 줄 알았을까?

어쩜 무기력한 아들에게 주는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양심적인 사랑이었을까?

작은 선택의 결과가

작은 선행의 결과가

인생에 어마어마한 나비효과를 가져오는 신비한 체험을 이 이야기를 통해 하게 된다.


[염소자리 친구]

바람길에 자리한 집 베란다엔 이상한 물건들이 가끔 찾아온다.

가까운 미래에서 온 신문조각처럼...

학교 폭력. 왕따. 친구. 살인. 자살.

일어난 일을 일어나지 않게 바꾸려 했던 행동.

누군가를 위한 일이 결국은 또 다른 누군가를 버리게 되는 일임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시간은 언제나 비워진 자리를 어김없이 채우는 법이니까.

다른 누군가를 대체해서라도...

눈앞의 우유 팩에 그녀가 토해낸 숨이 지금도 가득 차 있다.

살아있던 마지막 날, 사라지기 몇 시간 전의 그녀의 숨결이.



[소년 무나카타와 만년필 사건]

꽤 매력적인 캐릭터를 발견한 단편.

바로 무나카타라는 캐릭터다.

무나카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 학교로 전학을 왔는데 지금까지도 친구가 없다. 그가 미움을 받는 이유는 명확한데, 가까이 다가가면 악취가 나기 때문이다. 며칠씩 목욕을 안 하는지 머리카락은 기름으로 번들거리고 손톱 사이에는 새까만 때가 껴 있었다. 옷은 누레서 누가 봐도 며칠, 어쩌면 몇 주는 빨지 않은 것 같았다.




묘사만 보더라도 결코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당신이지만, 이야기를 읽어가는 동안 무나카타의 예리함과 끈기와 노력.

그리고 상황 판단력에 무릎을 치게 된다.

소년 탐정의 예리함과 재치가 이야기를 매력을 더해준다.

이 이야기에도 역시나 작은 선행이 깃들어 있다.

그냥 지나쳐도 되었겠지만 지나치지 않고 무나카타에게 건네주었던 십엔.

그것이 나중에 자신의 누명을 벗겨주는 원동력이 될 거란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관심 주지 않는 친구에게 사심 없이 빌려준 십 엔은

그녀가 누명을 쓰고 왕따를 당했을 때 홀로 외로웠던 그녀의 손을 잡아준다.

[메리 수 죽이기]

메리 수는 2차창작 관련 용어 중 하나로, 작가의 소망이 불쾌할 정도로 투영된 오리지널 캐릭터를 가리킨다고 한다.



스스로를 호빵 같은 스타일이라고 생각하는 작가 지망생은 게임 캐릭터가 첫사랑이고, 게임 관련 2차창작을 하며 교내 동아리에서 글을 쓴다.

2차창작물의 주인공 소녀는 작가의 바램이 투영된 소녀였다.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예쁜 소녀.

어느 날 선배 한 명이 한 말에 자극받아 자신의 작품 속 메리 수를 없애기로 작정한다.

자신의 바램이 잔뜩 투영된 메리 수를 없애려면 스스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주인공은 달리기를 하고,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더 꼼꼼히 조사하고, 그러는 사이에 몸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게 된다.

공상보다 현실이 점점 더 편해지게 되면서 그녀는 자신의 꿈을 잊게 된다.

호빵 시절엔 창작활동으로 자신의 바램을 충족시켰지만, 이미 현실에서 그런대로 멋진 삶을 살게 된 주인공은 자신의 과거를 까맣게 잊고 지낸다.

어느 날 찾아온 동아리 친구는 그녀에게 자신만의 글을 써보라 권한다.

그녀의 글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그녀가 동아리에서 썼던 글들을 후배들이 찾아 읽으면서 그녀도 모르게 후배들 사이에 꽤 유명해져 있었던 것이다.

잊고 있었던 작가에의 꿈.

메리 수를 죽인 그녀는 예전처럼 다시 글을 쓸 수 있을까?

글을 쓰기 시작해도 되겠다고 판단한 날, 결심을 굳히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하지만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2차창작이 아닌, 내 세계의 여행이 시작된다. 무엇이든 쓸 수 있다는 자유가 두려웠던 것이다.



[트랜스시버]

영화 프리퀀시를 떠올리게 하는 이 단편은 쓰나미로 아들과 아내를 잃은 남자의 애절함을 담았다.

아내와 아이를 잃고 매일 술에 취해 사는 그는 어느 날 아들의 유품인 무전기에서 지지직 소리가 나는 걸 발견한다.

그리고 그 무전기에선 아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렇게 술에 취해 아들과 무전기로 대화를 하는 남자.

건전지도 없는 트랜스시버는 어디에서 아들의 목소리를 내는 걸까?

현실일까? 환청일까?

이 이야기의 묘미는 마지막 줄에 담겨있다.

등골이 오싹한 느낌이 드는 마무리가 압권.


[어느 인쇄물의 행방]

이렇게 신선한 이야기는 또 처음이다.

3D프린터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출력의 한계는 어디까지 일까?

신선하면서도 구역질 나는 이야기가 참으로 담백한 표현력으로 전달되는 방식이라니.

이런 미래는 오지 않기를 바란다.

소각장에서 연기로 사라진 "그것"은 도대체 무엇으로 규정해야 옳은 걸까?

어느 계절

해바라기로 다시 태어날 "그것"에 후일에라도 이름을 붙여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에바 마리 크로스]

이 이야기야말로 환상특급 백미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토록 소름 끼치게 그로테스크한 이야기는 처음이다.

인간 악기는 어떤 소리를 낼까?

인간으로 만들어진 악기의 연주회...

사랑을 바치는 겁니다. 나쁜 거래는 아닙니다. 조건을 받아들이고 평안을 찾도록 해요.




사랑을 바친다는 게 어떤 건지 몰랐다 해도,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게 사랑일진대

너무 쉽게 포기한 대가가 어떤 건지는 두고두고 귀에 걸리겠지...

너의 에바 마리 크로스는 세상의 모든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졌지만

너의 귓가에는 언제나 남아있게 될 거야...



뭔가 일상이 지루해서 조바심 날 때

특별한 이야기가 읽고 싶을 때

신선한 자극이 필요할 때

이 양파 같은 작가가 쓴 메리 수를 죽이고를 손에 든다면

절대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다 읽기 전까지는

이 책의 매력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될 테니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 것.

앞으로 새로운 이름의 오쓰이치를 만나는 기쁨이 새록새록 쌓일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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