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연고
이생진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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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각종이 울려 퍼지는 날
주민등록증을 꺼내
나를 갱신한다
1929년 10월 1일생을
2017년 1월 1일생으로

 

 



구순의 시인은 덤덤하게 일기 쓰듯 시를 쓴다.
어려운 시어도
화려한 싯구도
미사여구 가득한 요란함 없이
매일을
일기처럼 시를 쓴다

담담하고
덤덤하고
아프지만 친절하고
슬프지만 웃음 짓고
아련하지만 현실처럼
그렇게 매일을 시를 적는다.

손자의 방문에
그 혈기 넘치는 아이를 보며
시인은 말한다.

내가
휴지처럼 구겨졌다.
다시 펴진다


사는 날까지 살아 보자고
막연한 소리지만 살자는 데 힘을 준다
오늘은 맑다
친구 목소리 들으니 하늘이 더 맑다
요즘은 너무 유치하게 산다





살아 있음에 유치해질 수 있고
살아 있음에 즐거울 수 있고
살아 있음에 오늘을 온전히 느낄 수 있어 좋은
시인의 마음이 곳곳에서 파릇파릇 생기 넘친다.



그리움




아내를 먼저 보낸 노시인의 시 곳곳엔 무심한 그리움이 담겨있다.
아내 없이 매일을 살아내야 하는 그는 그래서 더 씩씩해지기고 하고
그래서 더 고독해 보이기도 하다.

아내를 먼저 보낸 그와
치매를 앓고 있는 아내를 간병하는 어느 시인의 고단함이
시 끝에서 서럽게 운다. 


전화가 먼저 울고 그는 나중에 울었다
불쌍하다

세상모르고
행복이 뭔지 모르고
아내가 뭔지 모르고
섬으로 섬으로 돌아다니며
해리 시인은 난초를 보고
나는 고독에 취해 섬으로 섬으로 떠돌다 아내를 잃은 것 같아




시 쓰는 남자들끼리
젊어서 섬으로 섬으로 떠돌며 시를 썼던 두 남자
한 사람은 아내를 먼저 보냈고
한 사람은 병든 아내 곁을 지키며 때때로 전화기 너머 울음을 쏟는다.

지나고 나야
느껴지고
보아지고
알아지는 게 있지...





죽음




처음으로 이생진 선생님의 시를 접했다.
구순의 그를 처음으로 알게 된 지금 이 순간도 하나의 인연이리라 혼자 생각해본다.
시인이기 전에
인생을 먼저 살고 계신 어른으로서
그분은 그 어느 하나의 싯구에서도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서 책을 읽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음악은 이연실의 [소낙비](밥 딜런의 노래)를 늘 준비해놓고 있다
죽음의 준비는 미미하다


매일매일  시를 쓰면서
오늘 하루 시 한 편을 썼다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여 줄 뿐이다.
매일을 살면서 매일이 매일 올 거라 생각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시인은 말한다.




올 일년이 마지막이라며 산다
그렇게 살아 보니
오늘 쓰는 시가 마지막 시이고
오늘 만나는 사람이 마지막 만나는 사람이고
오늘 먹는 밥이 마지막 밥이고
오늘 보는 산이 마지막 산이고
그랬더니
오늘 만난 사람이 고맙고
오늘 살아 있는 내가 고맙고
오늘 자는 잠이 고맙고









시가 어려울 거라 생각했지만
뭔가 어려운 뜻을 담고 있으리라 지레짐작했지만
마치 누군가의 다큐를 보듯이 현실감 넘치는 일상의 느낌들에
저절로 고개를 주억거리고
저절로 눈이 젖어간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소중한지
내가 무엇을 잊었는지
내가 무엇을 잃어가는지
한 편의 시를 읽어가며 깨닫게 된다.



내가 나를 무관심하고 있을 때에도
시는 나를 무관심하지 않았으니까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서는 빛이 난다.



산 자에겐 고독이 있다
그 고독을 갈고닦아 시를 쓴다




시를 접할 때 느껴지는 막연함을
이 무연고 시집을 읽으면서 치유했다.
시가 어려운 게 아니었다
시를 어렵게 썼기에 어려웠을 뿐.

이생진 선생님의 시는
어려운 구절 없이 쉽지만
그 쉬움을 관통하는 세월이 맛깔스레 버무려져
깊이 아주 깊이 삶을 일깨워준다.

무연고.
같은 제목을 시를 읽었을 때
먼 미래일지
아니면 가까운 미래일지 모를
내 무덤 앞에서 서러워졌다.




머리로 씹는 시
시도 씹어야 맛이 난다



꼭꼭 씹는 쌀알에서 고소함이 더해지듯이
꼭꼭  씹어서 읽어야 하는 그분의 시는
삶의 단내와
삶의 즐거움과
삶의 그리움이
방금 파내어 서서히 물이 고여오는
맑고 시원한
우물 같다...



자고
일어나 또 걷고
내가 걷지 못할 때
죽음은 이미 와 있다
그때 죽음이 하라는 대로 하면 된다
조용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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