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개의 단편들.그 안의 여자들은 모두 자근자근 이야기를 풀어낸다.어느 한 명 악다구니 없이누구 하나 분노하지 않고어떤 여자도 이성을 잃지 않는다
눈은 어쩐 일인지 전혀 녹아내리지 않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이제 예전의 그 순수한 눈이 아니라고 했다. 눈에 너무 많은 불순한 물질들이 섞였고, 그래서 눈이 천천히 거품처럼 변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눈 속에 파묻힌 도서관그곳을 지키는 두 여자한 여자는 떠나려 하고한 여자는 버티려 한다.중요한 책 한 권을 잃은 여자책을 읽으며 변해가는 여자초록색 아보카도는 먹어 보지 않으면 그 맛을 짐작할 수 없지.더 이상 예전의 순수한 눈이 아닌 눈 속에 갇힌 두 여자의 겨울은 언제쯤 지나갈까.
차츰 이 집에서 낡아 버린 게 어쩌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불길.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필요했다.
이 책에 나오는 남자들은 모두 의지가 없다.세상을 살아내는.다 낡고, 헤지고, 파삭거리고, 미지근하다.여자들은 모두 그들을 대신하지만 서글프게 굳건할 뿐이다.모질고, 약삭빠르고, 악착같지 않아서 담담한 그녀들.그렇지만 문장들 곳곳에서 숨 쉬는 그녀들의 존재는 준엄하다.가다가다 만나는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표현들이 코끝에 걸린다.시큰거리는 감격으로 가슴 바닥에 고인다.
우리도 세상에 올 때 그런 줄을 가지고 오지 않았냐? 그러니 우주로 갈 때도 긴 은색 줄이 있어야겠지. 그런 줄을 가지고 있다면 우주로 나가 한 번 빙글빙글 돌아보고 싶다. 그러다가 툭 끊어지면 우주로 빨려 들어가 별이 되고 싶고.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우려먹으며 자란 그녀.그 어머니의 일곱 개의 가방 안엔 어머니의 인생이, 삶이 담겨 있었다.어머니의 이야기는 가방에서 우주로 뻗어갔지만 수많은 줄들에 연결된 어머니는 우주를 유영하는 대신 병원 침대에 묶여 있다.
누구나 태어날 때 가방을 하나 가지고 오지. 자기가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가방에 뭐가 들었는지 아는 사람이 세상 떠날 때도 마음이 편한 거다.
내가 가진 가방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늙은 아버지는 고백하듯 말했다. 그 부끄러움은 밀도 있게 내부에서 차올라 오는 지하수 같은 것이었다.
콕 집어 조근조근 따져야 하는 아버지에게 엄마는 앞뒤를 휙휙 뛰어넘는 비약의 화법으로 말했다. 늘 앞질러 가는 엄마의 말을 아버지는 뒤에서 주워 담았다.
처음 읽게 된 정미형 작가님의 이야기.낯선 이들에게서 받은 영감이 글로 표현되는 방식이 참 오묘하다.정스럽다가 냉철해지고고달프다가 미묘해진다서글프다가 그리워지고담담하다가 절절해진다.꿈속 같고 몽롱하다.갑자기 현실 속에서 퍼뜩 깨어난 느낌이다.여덟 개의 이야기에서한 여자의 흔적이 남는다.그게 작가인지그게 나인지이젠 분간이 가지 않는다.포근한 안갯속에서 안겨 있다 나온 느낌이다.일곱 개의 가방 안엔여덟 가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