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 제인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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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비바, 제인

 

레이철

이 이야기에서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이 있다면 단연 레이철이다.
나는 그녀의 신랄함이 좋다.
필립 로스를 좋아하고, 교육자였고, 아비바의 엄마이고, 로즈의 친구이며 자신의 삶을 주관 있게 살아가고 있고
어떤 일에도 호들갑스럽지 않은 레이철 셔피로.

예순넷이 된다는 건 다시 고등학생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
내가 할 말이 많다만!
나는 언제 그만해야 하는지 안다.

 

나도 그녀처럼 멋지게 나이 들어가고 싶어졌다.
아비바에게 그녀는 친구였고, 루비에게 그녀는 처음 보지만 언제나 알았던 할머니였다.
자식의 어리석음을 걱정하지만 탓하지 않았고, 그저 지켜보는 거 같았지만 성인인 딸이 제대로 선택해주기를 바라면서 표 안 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소식한 통 없이 그녀의 인생에서 사라졌다 뜬금없이 전화해서 손녀딸을 찾아와주라는 부탁에도
잔소리 없이 쿨했던 레이철 셔피로.
아비바에게 전해졌을 그녀의 한 부분이 제2의 인생을 살게 하는 자양분이 되었을 게다.

나는 이따금 마이크와 마주친다. 그는 재혼했다. 덧붙이자면 그때 그 정부는 아니다. 그 불쌍한 여인은 기다리고 기다리다 결국 그를 딴 여자한테 장가보냈다. 나는 내 처지보다 그녀의 처지에 훨씬 더 분노했다.
.
.

레빈 얘기도 해야 할까? 그는 여전히 하원에 있다. 다른 사람들 딸 앞에서 제 성기는 그럭저럭 잘 간수하고 다니는 모양이다. 그 얼마나 훌륭한 남자인가.


아비바 스캔들로 학교에서 사임 후 그녀는 남편의 오랜 정부 최를 찾아간다.
그곳에서도 그녀는 마치 오랜 친구와 차 한 잔을 마시듯 수다를 떨었다.
화를 내고, 분노하고, 소리를 지르지 않고도 자신의 감정을 비워내며서 상대에게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그녀의 방식이 내겐 신선하게 다가왔다.
비록 남자 보는 눈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제인 영

 

 

제인.
우리나라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영희와 같이 흔한 이름.
아마도
특별했던 이름으로부터 숨기엔 가장 보통스러운 이름이 간절했을 것이다.
루비라는 이름의 딸과 함께 메인주 엘리슨 스프링스에 살면서 행사 기획사를 차린다.
주로 웨딩 플래너가 주 업무이기는 하지만.
똑똑하고 조숙한 딸 루비를 조수 삼아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

당신이 내 정체에 대한 당신 생각을 떠벌려봤자 그게 나한테 무슨 영향을 주겠어? 사람들이 신경이나 쓸까? 아마 안 쓸걸? 난 일개 시민에 불과하고 누구한테 표를 받아야 할 일도 없잖아? 난 아무 때고 딴 데로 이사 가서 웨딩플래닝을 하면 그만이지.


이렇게 말했지만 상황이 그녀를 그녀의 오랜 꿈으로 몰고 간다.
그래서 시장 선거에 출마하기로 한다.
과거의 그림자를 걷어낼 마음의 준비가 이제서야 되었다.
루비.  그 한고비만 빼고.




루비

 

 

열세 살.
아빠는 일찍 돌아가셨다고 알고 있고, 엄마와 함께 메인 주에 산다.
학교생활은 그닥 재미없다. 별로 인기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치한 애들하고는 레벨이 다르니까.
친구 같은 엄마의 조수로서 엄마의 일을 돕고 있다.
엄마가 시장 선거에 출마하고 선거운동을 돕는 일도 한다.
그러다.
알게 됐다.
엄마의 과거를. 
내 출생의 비밀을.

"엄마는 왜 시장이 되려는 거야? 그렇게 많은 비밀을 가진 사람치고 너무 멍청한 짓 같아."
"나도 모르겠다, 루비. 아니, 알기야 알지, 네가 나이가 들면 알게 될 거야."
"지*한다, 아비바 그로스먼!"
엄마한테 '지*한다'고 한 건 하나도 미안하지 않아. 왜냐면 (1) 십삼 년 동안 거짓말을 한 주제에, (2) '나이가 들면'알게 될 거라니, 너무 어이가 없잖아.

 

무모하게 보이겠지만
난 아빠를 찾아 플로리다로 간다.
우리 아빠는 하원의원이 분명하다.



엠베스

 

 

그녀는 변호사이자 하원의원의 아내다.
그녀를 보자니 미국 드라마 굿 와이프의 첫 장면이 떠오른다.
기자회견장. 플래시가 불꽃처럼 터지는 그곳에서 다소곳한 알리샤는 남편의 곁을 지킨다.
성 스캔들로 위기의 시간을 맞은 그 남편 옆에서 남편의 손을 쥐여주고 웃음으로 우리는 굳건하다를 보여준.

사실 남편이 바람피운 게 그렇게까지 대수로울 건 없었다. 공개적으로 바람피운 남편을 둔 아내가 됐다는 게 힘들었다. 부당한 대우를 받은 여자라는 몸에 안 맞는 수의를 입고 있는 게 힘들었다. 남편이 사과할 때 그 옆에 온순하게 서 있는 게 힘들었다. 눈길을 어디다 둬야 할지 파악하는 게, 적절한 정장 재킷을 고르는 게 힘들었다.

그녀는 십오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자신을 아비바 게이트 이후에도 남편 곁을 지켰다는 사실로 평가하는지 궁금했다.

 

남편은 하원의원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그녀 덕에.
아마도 그녀는 아비바를 희생양으로 내버려 둔 건지도 몰랐다.
어쩜 그 대가를 지금 받고 있는 건지도 모르고.
어쩜 내비치지 못했던 가슴 앓이가 암처럼 그녀 몸에 기생한 건지도 모른다.
어쩜 두 아들과 아들과 다름없는 남편을 지켜내는 게 그녀의 의무였는지도 모르지.

이것이 결국 그녀의 인생일지도 모르겠다. 이 남자를 위해 그녀는 거짓말을 했고, 사람들을 속였고, 오욕을 참고 견뎠고, 알고도 모른 척했다. 이 남자가 불쾌한 일을 겪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 비호했다. 루비, 세상의 파괴자로부터 이 남자를 지켜냈다.
그녀는 그 어떤 여자보다 더 에런 레빈을 사랑했다.

 

 

그런 거다.
부인이란 직업은...


아비바(봄철, 순진무구함)

스무 살 여자아이는 사랑을 착각했을 뿐이었다.
호기심이 사랑으로 변질되기 가장 쉬운 나이.
동경을 사랑으로 오해하기 가장 쉬운 나이.
성공한 남자가 멋져 보이는 가장 어린 나이.

그는 장난감이 잔뜩 있는 어린애이고 당신은 그가 가끔 생각날 때만 갖고 노는 인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당신은 끊임없이 그가 그립다. 심지어 그와 함께 있을 때도 그가 그립다.

그가 가고 나면 당신은 그의 쓰레기통이나 여행가방이 된 기분이다. 사랑받는 게 아니라 기능성 도구가 된 기분이다.

 

아비바가 자신을 위해 옳은 선택을 해주길 바랐다.
아마도 자신감 결여에서 온 결핍을 대단한 남자와의 사랑으로 채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불륜의 대가는 혹독했다. 그녀에게만.
그는 재선했다.
그리고 그의 결혼생활은 끝나지 않았다.

본질을 흐리는 것들이 그녀의 인생을 망가트렸다.
물론 그녀의 행동이 옳은 건 아니었지만
공인으로서 자기 딸 나이의 여자와 불륜 행각을 벌인 정치인은 면죄 받았다.
그 스무 살짜리 여자는 그 남자의 죄까지 걸머지고 난파되었다.
아비바 그로스먼이라는 이름으로는 어디에서도 사람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

"왜냐면 그 편이 더 나으니까. 결국 언젠가는 나오게 될 얘기였어. 난 그때 일이 부끄럽지 않아, 더이상은. 또 당시 내가 처했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내가 했던 일들도 부끄럽지 않아. 그리고 만약 사람들이 그때 일로 나를 평가하고 싶어서 나에게 투표하지 않겠다면, 그건 그들의 선택이지."

혹독한 시련은 강건함을 키운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
이 이야기에서 유일하게 대가를 치르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면 남자들이다.
그들은 책임도 지지 않았지...

부당함을 느끼는 동시에 통쾌했다.
난장판을 만들 수도 있는 이야기를 이토록 깔끔하게 갈무리하다니.
울분을 토해도 모자랄 이야기를 이토록 아무렇지 않게, 게다가 유머러스하게까지 포장하다니.
명치끝이 꽉 막혀서 체증을 유발할 거 같은 이야기를 이렇게 희망스럽게 끌고 가다니.
각자의 입장에서의 여성들이 한 사건에 연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찌질하지 않게 인생을 통제하는 방식이 감동적이다.
게다가 이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여성들은 죄다 멋스럽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복병 같은 암초를 만나게 된다.
그것들은 전부 내 선택의 결과이다.
옳은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노력이 역부족일 때도 있다.
그 결과는 나를 파괴하려 하지만, 아니 파괴하지만, 그걸 견뎌내고, 이겨내는 건
바로 나 자신이다.

아!비바는 실패하는 인생을 선택했지만.
제인은 실패한 인생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인생을 선택했다.

불륜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 책임은 불륜을 저지른 두 사람이 똑같이 져야 한다.
하지만 세상은 여자보다는 남자들에게 더 많은 면죄부를 준다.
남자는 그래도 된다는 누가 정했는지 알 수 없는 불문율이 적용받는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모든 경멸과 모욕은 여자에게 쏟아진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런 이야기엔 국적도 선진국도 문명국도 다 포함되지 않는다.
역사가 그래왔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가정을 지키는 건 왜 여자여야만 할까?
엠베스가 알리샤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하원의원 레빈은 없었을 것이다.
힐러리가 옆에서 미소 짓지 않았다면 대통령 클린턴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렇게 해서 남은 건
인생의 그늘이다.
얼룩진 고난의 행보이고.
그녀들의 시간 낭비였을 뿐이다...

모건 부인처럼 나이 들고 싶어졌다.
한때의 실수를 실수로 알아봐 주는
그래서 손 내밀어 줄 수 있는
그런 어른으로...


아~ 비바, 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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