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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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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영화로 나온다고 하지만

난 절.대.로. 그 영화를 보지 않을 작정이다.

소설로도 충분하다.

충분히 무섭고 절망적이었다.

그리고 쐐기를 박듯, 잔인한 희망까지 심어준다.

 

그 어떤 호러무비의 피가 철철 흐르는 장면보다

이 책의 한구절 한구절을 상상하는 것이 더 끔찍했다.

눈을 감으면 내 상상 속은 온통 잿빛이다.

지하실 환기창을 통해 보는 햇빛처럼,

소설 속의 햇빛은

숨막힐듯 먼지가 빽빽히 들어찬 공기 사이를 뚫고

간신히 존재만을 알리고 있다. 

 

우리가 알던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독자는 알 수가 없다. 그저 상상할 수밖에.

무시무시한 뭔가가 모두를 태워버렸고

남은 것은 재와, 먼지, 약탈자들, 소수의 생존자들뿐이다.

 

보이지 않는 달의 어둠. 이제 밤은 약간 덜 검을 뿐이다.

낮이면 추방당한 태양은 등불을 들고 슬퍼하는 어머니처럼

지구 주위를 돈다.

(이 표현이 너무 가슴아프고 비참하면서도 아름다웠다. p.40)

 

그 폐허를 아버지와 소년이 걷고 있다.

더럽고, 냄새나고, 배고프고, 지친 채.

지난 세상의 기억은 달콤한 추억이 아니라

현재를 더욱 힘들게 만드는 악몽일 뿐이다.

읽는 게 너무 힘겨웠다.

그들의 삶이 언제 당장 끝장나버릴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애간장을 졸이면서 제발, 제발..무사하기를 바랬다.

 

아빠는 정말로 용감해요?

중간 정도.

지금까지 해본 가장 용감한 일이 뭐예요?

............

오늘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난 거.

(p.307)

 

남자는 거의 매일 밤 어둠 속에 누워 죽은 자들을 부러워했다.

(p.260)

 

남자에게 소년은 빛이고, 세상이었으며, 희망이었고,

그 폐허를 살아가는 이유였다.

남자의 선택은, 그 희망을 꺼뜨리지 않는 것이었다.

진정 용기일까, 그보다는 덜하지만 진한 부성애일까.

 

난 이 작가를 처음 만난다.(물론 소설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소설이 있는데

꽤 오랫동안 내 '보관함'에만 들어있고

'장바구니'로 옮겨진 적은 없었다.

'로드'를 읽고 나서 그 책이 궁금해진다.

거기서도 작가는 잔인할 정도로 솔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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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 벌레 이야기
이청준 지음, 최규석 그림 / 열림원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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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감독의 '밀양(Secret Sunshine)'의 원작.

 

그림과 글을 합쳐 겨우 100페이지를 간신히 채운 듯한

얄팍한 두께에, 처음엔 실망을 금치 못했다.

뭔가 더 두껍고, 무게있고, 심도깊은 이야기를 기대했던 탓이다.

 

영화가 매우 인상깊었던 나에게

이 책, 날 실망시킬 것 같아, 라는 느낌을 갖게 한건

'벌레 이야기'가 처음인 듯하다.

하지만 얇은 책을 손에 들고 한참동안 표지를 들여다보다가

'벌레 이야기'라는 원제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깨달으면서

이 책이 무게처럼 가볍지는 않으리라는 예상을 할 수 있었다.

 

전도연과 송강호가 연기한 밀양.

이 책 어디서도 지명으로써의 밀양은 나오지 않는다.

송강호가 맡았던 역할은, 남편이 대신하고 있다.

그제서야 난, 영화와 소설을 일단은 떼어놓고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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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영화를 사랑한다던 한 외국인과 술을 한잔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로 '밀양'을 들었다.

그 이유는, 그 이유는.. 너무나 인간적이었기 때문이다.

 

자식을 잃은 모성은 그 자식을 앗아간 존재에 대한

복수심으로 산다.

바람직하든 아니든간에, 우선은.

그게 당연한 일이다. 그게 인간이다. 그걸 비난할 수는 없다.

종교..용서.. 이런 게 틀리진 않았다.

하지만, 인간에겐, 적어도 내 생각엔, 신이고 용서고 자비고 간에

일단 자기 상처를 핧을 시간이 필요하다.

울부짖고 원망하고 몸부림치고 절규하면서.

 

화자의 아내가, 아이가 사라졌을 때보다,

아이가 시체로 발견되었을 때보다,

더 절망하고 좌절하게 만든 건 어이없게도

용서해주고자 찾아간 범인이 오히려

자신을 원망하는 희생자 엄마를 용서하겠다는 태도였다.

범인은 사형이 확정되고 종교를 믿으면서

하느님께 용서를 받았고, 그래서 마음이 평온해진 상태였다.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가 있어요?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를 용서합니까.

 

자기 용서의 증거를 구하기 위해 사형수를 찾아간 아내도

물론, 당돌했다. 선을 넘었다.

이야기 속에는 김집사라는, 이웃이 한 명 나온다.

절망에 빠져있는 아내에게 김집사는

지극히도 하느님의 편을 든다.

 

작가의 서문에 이런 말이 있다.

"이 소설은 사람의 편에서 나름대로 그것을 생각하고

사람의 이름으로 그 의문을 되새겨본 기록이다.

사람은 자기 존엄성이 지켜질 때

한 우주의 주인일 수 있고 우주 자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체적 존엄성이 짓밟힐 때

한갓 벌레처럼 무력하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그 절대자 앞에 무엇을 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가."

 

신은 대답이 없지만,

피해자에 앞서 범인을 용서할 권리가 있는가, 라고 묻고 있다.

신은 대답이 없지만,

그래서 신이 용서를 했는지 안했는지 판단하는 건

결국 인간이 아닌가, 라고 난 생각한다.

 

참 복잡하고 머리아픈 내용이다.

그러면서도 너무 인간적이다.

100페이지밖에 안되는 소설이, 내 머리를 싸매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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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의 즐거움 - 개정판 매스터마인즈 1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지음, 이희재 옮김 / 해냄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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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적인 자기계발서가 난무하는 요즘

뭔가 과학적으로 탄탄한 바탕을 갖춘 자가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면 말을 좀 듣지 않을까 싶어

구입한 책.

 

원제는 finding flow.

몰입의 즐거움이라는 제목으로 나왔지만,

이 사람이 지은 또다른 몰입 시리즈의 입문서쯤 되지 않을까?

모르겠다. 다른 책은 읽어보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어떤 때 즐거워하거나 행복해하거나 몰입하는지를

이렇게 열심히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다.

 

'몰입'은 삶이 고조되는 순간에 물 흐르듯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느낌을 표현하는 말이다. ... 적절한 대응을 요구하는 일련의 명확한 목표가 앞에 있을 때 몰입할 가능성이 높다.' p.45

 

'몰입은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버겁지도 않은 과제를 극복하는 데 한 사람이 자신의 실력을 온통 쏟아부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p.46

 

'결국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일을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다.' p.65

 

'중요한 것은 나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찾아내는 일이다.' p.66

 

인생을 알차게 살기 위해선 적절한 목표와 능력을 갖추고

몰입해서 살아라...라는 게 이 책의 요점인 듯.

 

'말은 쉽다' p.56

내 말이.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내 일상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고,

삶의 방향을 잃은 듯 살아가는 게

쉽긴 하지만 행복하진 않음을 새삼 깨달았다.

저자의 실험방법처럼 하루를 잘게 쪼개서

랜덤으로 고른 시점에

내가 뭘 하고 있으며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기록하면 참 좋겠지만,. 그러기엔 좀 바쁘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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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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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씨의 소설.

참 유명한 작가님이신데,

난 이분의 소설을 처음 읽는 것 같다.

그것도 출국날짜에 떠밀려

우리나라 것을 많이 섭취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허겁지겁 읽었더랬다.

심하게 몰입되는 내용과 화법이라

허겁지겁이 가능하기도 했다.

 

책을 탁, 덮고 나서

얼른 작가 후기를 꼼꼼히 읽어내려갔다.

신경숙, 이 분의 이야기가 아니기를.

무사히 엄마를 찾았기를. 엄마가 돌아가시지 않았기를.

그럴 정도로 난,

이 이야기의 생동감에 깊이 빠져있었던 거다.

다행히도 작가가 소설을 마친 후

시골에 계신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길래

휴~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세상의 엄마는-극소수를 제외하곤-다 똑같이 고귀하지만

이 소설 속의 엄마만큼은 제발,

그렇게 길에서 죽어버리지 않았기를 빌고 또 빌었다.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였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엄마는 엄마였다.

엄마가 어떤 사춘기를 보내고, 어떤 남자를 사랑했고,

엄마 꿈이 뭐였고, 무슨 일을 할 때 가장 행복했는지,

그런 건 생각도 못했고 관심조차 없었다.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였으니까.

 

우리는,

그걸 잊고 산다.

엄마가 엄마이기 이전에 어떤 여자였을지.

그래서 코끝이 찡해진다.

나는 과연 엄마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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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중지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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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의 나방이 왜 친숙하게 느껴지나 했더니

영화 '양들의 침묵' 포스터에서 얼굴을 익힌 아이다.

해골나방. 아케론티아 아트로포스.

" 그 흉부 뒷면에는 인간의 두개골을 닮은 무늬가 있으며,

날개 길이는 십이 센티미터에 이르고, 색깔은 거무스름하다....

우리는 이것을 아트로포스, 즉 죽음이라고 부른다. " p.232

 

늘 다양한 주제로 설정된 실험을 펼쳐온 작가는

이번 책에서는 '다음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로 시작하는

실험을 선보인다.

 

이 분 특유의,

따옴표 없이, 의문부호 없이 길게길게 이어지는 서술방식이나,

인간의, 심지어 개의 심리묘사가 너무도 치밀한 나머지

어려운 철학책을 읽는 듯 착각하게 만드는 특징에도 불구하고

이 '죽음의 중지'는 이전의 작품들보다

눈에 보기에도 얇았고 읽기도 수월했다.

 

같은 제목의 두 이야기를 읽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다음 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서

똑같은 문장으로 끝이 남에도,

그 두 문장이 주는 의미와 떨림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 두 문장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난 아직도, .. 사실은 그걸 생각 중이다.

 

이 나라(포르투갈이겠지?)에서, 어느 날부터 아무도 죽지 않는다. 몸이 두 쪽이 난다든지 하는, 죽어 마땅할 상황에서도.

죽지 않는다는 것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님을,

그 사회적 혼란을, 소설 앞부분에서 열심히 보여준다.

정치가들, 종교인들, 생명보험사, 마피아..

7개월 째, 일손을 놓아버린 '죽음'은

어느 날 실체를 갖고 나타난다.

방송사 사장에서 편지를 써서

내일부터는 다시 활동을 시작하겠다고 알려온다.

또다시 혼란.

 

죽음의 활동을 중단했던 이유를 잠시 들어보면,

" 그건 나를 그렇게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언제까지나 산다는 것 영원히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맛을 좀 보게 해주려는 것이었어요. " p.133

 

대신, 죽음은 앞으로 사람들에게

죽기 전 일주일의 시간을 주기로 한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의미에서.

하지만 죽음이 의도한 바대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차분히 준비하고 정리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이쯤에서 갑자기 실체를 갖게 된, "죽음"이라는 주인공.

작가가 만든 이 존재는

이전에 내가 읽었던 '사신 치바'나 '책도둑'에 나오는 사신들과

그 이미지와 역할이 비슷하지만, 훨씬 더 구체적이다.

"수의로 몸을 감싼 해골이며..

낡고 녹이 슨 낫과 함께 추운 방에 살고,

방에는 거미줄과 더불어 서류 정리용 캐비닛이 수십 개 있는데..." p.192

그리고, 놀랍게도..이 책에 나오는 사신, 아니 죽음은

여성성을 갖고 있다.

 

소설의 뒷부분은 죽음 자신의

개인적인 분노와 의문, 의무, 업무 등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 점이 날 혼란스럽게 한다.

물론, 뛰어나게 흡인력있고 재미있지만,

작가는 갑자기 실험 중에 실험실을 뛰쳐나가 버린걸까?

아니면, 그와 관련된 또다른 실험에 빠져들어 버린걸까?

 

죽음은 너무나 당연하게 수천년간 이어져 온 자신의 업무에서

딱 하나의 예외에 맞닥뜨리고 당황한다.

한 첼리스트가 죽음의 통보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았다.

일주일 후의 죽음을 알리는 자주색 편지봉투가

알수 없는 이유로 죽음에게 자꾸만 되돌아온다.

 

죽음은, 그 예외적인 사건을 직접 조사하기로 하고

인간의 모습으로 첼리스트의 삶에 뛰어든다.

그리고, 서서히 첼리스트의 삶에 동화되어 간다.

아름다운 음악과 부드럽고 따뜻한 첼리스트의 개.

 

그리고, "다음 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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