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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 벌레 이야기
이청준 지음, 최규석 그림 / 열림원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이창동 감독의 '밀양(Secret Sunshine)'의 원작.
그림과 글을 합쳐 겨우 100페이지를 간신히 채운 듯한
얄팍한 두께에, 처음엔 실망을 금치 못했다.
뭔가 더 두껍고, 무게있고, 심도깊은 이야기를 기대했던 탓이다.
영화가 매우 인상깊었던 나에게
이 책, 날 실망시킬 것 같아, 라는 느낌을 갖게 한건
'벌레 이야기'가 처음인 듯하다.
하지만 얇은 책을 손에 들고 한참동안 표지를 들여다보다가
'벌레 이야기'라는 원제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깨달으면서
이 책이 무게처럼 가볍지는 않으리라는 예상을 할 수 있었다.
전도연과 송강호가 연기한 밀양.
이 책 어디서도 지명으로써의 밀양은 나오지 않는다.
송강호가 맡았던 역할은, 남편이 대신하고 있다.
그제서야 난, 영화와 소설을 일단은 떼어놓고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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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영화를 사랑한다던 한 외국인과 술을 한잔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로 '밀양'을 들었다.
그 이유는, 그 이유는.. 너무나 인간적이었기 때문이다.
자식을 잃은 모성은 그 자식을 앗아간 존재에 대한
복수심으로 산다.
바람직하든 아니든간에, 우선은.
그게 당연한 일이다. 그게 인간이다. 그걸 비난할 수는 없다.
종교..용서.. 이런 게 틀리진 않았다.
하지만, 인간에겐, 적어도 내 생각엔, 신이고 용서고 자비고 간에
일단 자기 상처를 핧을 시간이 필요하다.
울부짖고 원망하고 몸부림치고 절규하면서.
화자의 아내가, 아이가 사라졌을 때보다,
아이가 시체로 발견되었을 때보다,
더 절망하고 좌절하게 만든 건 어이없게도
용서해주고자 찾아간 범인이 오히려
자신을 원망하는 희생자 엄마를 용서하겠다는 태도였다.
범인은 사형이 확정되고 종교를 믿으면서
하느님께 용서를 받았고, 그래서 마음이 평온해진 상태였다.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가 있어요?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를 용서합니까.
자기 용서의 증거를 구하기 위해 사형수를 찾아간 아내도
물론, 당돌했다. 선을 넘었다.
이야기 속에는 김집사라는, 이웃이 한 명 나온다.
절망에 빠져있는 아내에게 김집사는
지극히도 하느님의 편을 든다.
작가의 서문에 이런 말이 있다.
"이 소설은 사람의 편에서 나름대로 그것을 생각하고
사람의 이름으로 그 의문을 되새겨본 기록이다.
사람은 자기 존엄성이 지켜질 때
한 우주의 주인일 수 있고 우주 자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체적 존엄성이 짓밟힐 때
한갓 벌레처럼 무력하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그 절대자 앞에 무엇을 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가."
신은 대답이 없지만,
피해자에 앞서 범인을 용서할 권리가 있는가, 라고 묻고 있다.
신은 대답이 없지만,
그래서 신이 용서를 했는지 안했는지 판단하는 건
결국 인간이 아닌가, 라고 난 생각한다.
참 복잡하고 머리아픈 내용이다.
그러면서도 너무 인간적이다.
100페이지밖에 안되는 소설이, 내 머리를 싸매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