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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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에 태어나 올해로 여든이 된,

노작가의 마지막 소설이다.

줄리언 반스 작가는 아주 오래 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소설로 처음 만났는데,

그 때 이후로 대륙 멀리 떨어진 내 마음 속 작가에게는

시간이 멎어있다고 생각한 건지..

이 분이 이렇게 연로한 모습으로

마지막 작품을 언급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

사실 그의 소설들은 (적어도 나에게는)

천천히 읽고, 다시 읽어야 할 책들로 여겨져왔는데,

내가 나이가 들면서 그의 작품의 깊이를

이전보다 더 폭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이지만)

삶을 바라보는 밀란 쿤데라의 날카로운 시선과

이언 매퀸의 고급스런 영국식 유머를 섞어놓은 듯한 그의 글은

한 번만 읽고 덮어버리기엔 너무 아깝다.

대작가로 많은 글을 쓰고 이제는 암투병을 하며

남은 생을 평화롭고 고요하게 보내리라는 그의 뒷모습에

열렬히 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 한 켠에는,

이제 더 이상 삶의 통찰을 담은 그의 소설을 볼 수 없을거라는

아쉬움도, 독자로서 당연한 감정이리라.

​



표지를 넘기면 줄리언 반스가

한국 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적혀 있다.

원제목 <Departure>가 아니라 한국어판 제목

<What has left will not return>으로 언급한 것이 인상적이다.

떠남, 출발이라는 원제목의 의미를 충분히 담았다고 공감했던 걸까.

그는 이 소설이 픽션과 논픽션, 자서전이 결합된 하이브리드이며,

스스로 감사와 작별인사를 담은 "마지막 책"임을 밝히고 있다.

줄리언 반스를 처음 알았다면 적어도 스무 권 이상의

그의 소설이 세상에 나와 있다는 사실을 위로처럼 건네지만,

그 유한함, 더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에는 조금 슬퍼진다.

독자의 욕심인지도 모르겠다.

​

원제목이 의미하는 것은 '떠남', '출발', 이다.

그는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

"떠남은 대개 도착에 이른다. (..)우리는 가고, 우리는 도착하고, 우리는 귀환에 나서고, 다시 집에 다다른다. 우리는 그런 타성을 가지고 산다. 하지만 그런 궤도는 더 크고 더 모순된 구조 안에 놓여 있다. 우리 삶에서는 도착이 먼저 오고 떠남은 마지막에 온다. 도착으로 이어지지 않는 떠남이지만​."(p.215)

​

맥락을 좀 다르지만 이승우 작가의 <고요한 읽기>에 나왔던

"우리는 출발지에 도착한다"라는 구절이 생각난다.

줄리언 반스의 말대로 우리가 태어난 것을 이 세상에 '도착'한 것으로 볼 수 있고

이승우 작가의 말처럼 삶의 끝에 '도착'한 후 맞닥뜨리는 것은

어디로 도착할지 모르는 '출발지'일 수 있다.

우리는 그 출발지에서 어떤 곳으로 '떠난다'.

줄리언 반스는 그 출발지에서 '떠남'을 준비하고 있다는 메시지가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

그는 쇠퇴를 인정한다.

"이 세상에 오는 순간부터(...) 우리의 조각들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다"라는

플로베르를 인용하면서,

몸의 일부가 수십 년 동안 천천히 기능이 약해져왔으며(p.259)

이제는 혈액암의 공격을 받고 있지만

특수한 종류인 이 골수 증식성 종양이

자신을 죽이지 않으며 그 또한 그걸 죽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저 병이 광포해지는 걸 막으면서 그는 암과 함께

"죽는 날까지 팔짱을 끼고 터덜터덜 갈 것이다"(p.360)

​

"나로 말하자면, 나는 이제 일흔여덟이고 이것이 분명히 나의 마지막 책이 될 것이다. 나는 공식적으로 떠나고, 이 책은 나와 당신의 마지막 대화가 될 것이다. 나 자신이 고른 시간에 마지막 책을 끝내고 입을 다무는 것에는 적어도 한 가지 유용한 결과가 있다. 뭔가를 쓰던 중간에(..) 중단되지는 않는다는 것. 이런 식으로 죽음에 선택권을 넘겨주지 않고 있는 셈이다."(p.252)

​

이 책을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선언함으로서

육체적 인간으로의 존엄을 넘어서 작가로서의 존엄을 지키는 방식,

아, 그래서였구나..

독자의 입장에서

그의 작품이 더 나오지 않을 것임을 애석해하던 아쉬움을 싹 거두고

그의 선택과 결정을 존중하기로 한다.

​

이 책은 기억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을 강렬한 스토리가 있는 소설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

줄리언 반스는 "기억은 정체성이다."(p.20) 라고 선언하며

"우리 안에 저장된 IAM이 합쳐서 우리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또 과거에는 어땠는지 보여주게 된다."

라고 말한다.

IAM은 Involuntary Autobiographical Memory,

즉 불수의 자전적 기억으로 번역된다.

(대표적으로 유명한 사례가 있는데,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홍차와 마들렌이 불러일으킨 기억들이

이책 이외에도 다른 작가들에 의해 자주 언급된다.)

​

줄리언 반스는 기억을 화두로 그의 기억력,

과거의 기억들과 기억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사유한다.

필연적으로 노화와 연관지을 수 밖에 없는 여러 질문들이 수반된다.

​

"상상해 보라, 그냥 상상해 보라. 당신은 늘 간신히 꿈이나 꿀 수 있을 것 같던 일을 해서 '작가가 되었다'. 심지어 성공을 거둔 작가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인생이 끝날 무렵에는 무엇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가? 당신이 가장 이루고 싶었던 것의 망각. 당신이 의도하고 구축하여 세상에 내놓은 모든 것이 당신이 뇌에서 지워져 버린다."(p.238)

​

"글을 발표한지 44년이 지나니 내가 나 자신을 반복하기 시작하고, 똑같은 낡은 비유와 밈으로 돌아가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말을 되풀이하고, 심지어(실제로는 아니기를 바라지만) 내 우스개마저 반복한다는 느낌, 또는 생생한 두려움도 있다."(p.247)

​

또 한편으로는 옛 커플이었던 친구 스티븐과 진을,

40여년이 지나 다시 이어주면서 옛 기억과 현재의 삶을 이어붙이려는

노력을 해 보기도 한다.

​

"그래,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건 더 어려워진다. 하지만 사귀게 되면 만족감도 더 커진다. 갑자기 당신이 있는 곳에 완전히 신선하고 익숙하지 않은 삶이 나타난다. 발견되지 않은 과거와 아직 탐험해야 할 미래가 눈앞에 있다. 따라서 지금 이야기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것이 '새로운 새' 친구의 즐거움이다. 반면 '새로운 오랜' 친구를 실제로 사귈 수 있다면, 자족감과 사내들만의 편견에 젖어들기 십상일 게 분명하다. 감상에 푹 젖어 코르덴 바지를 입고 파이프를 씨으며 맺는 유대감 비슷한 것."(p.14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새로운 오랜' 친구로

과거의 커플을 다시 연결해주었고,

40년의 공백이 있는 그들을 관찰하면서 자신을 돌아본다.

그들이 다시, 두 번째로 서로를 떠나자

스스로 삶과 픽션을 혼동하고 있었다고 반성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옛날과 달리 초연하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이 공정하다고, 또는 공정해야 한다고 믿지만

그것은 아마도 종교적 믿음의 찌꺼기 때문일 것이고,

사실 노년의 그에게 마음의 안정을 주는 간단한 구절은

"우주가 그냥 자기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p.200)라는 것이다.

​

책 전체가 그 간 작품활동을 하면서 못다 한 말들,

그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들 정리와 고백으로

견고하고 무게감 있게 느껴진다.

그의 기억(과거)과 통찰 외에도

예술의 불멸성에 대해 남은 우리들에게 던지는

서늘한 메시지도 있다.

​

"우리는 이 행성을 날려버리면서 그와 더불어 모든 예술도 날려버릴 것이다. 아니면 생존은 하겠지만,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떤 것-현재의 우리, 신과 사랑과 행복과 예술을 소박하게 갈망하는 우리와는 전혀 닮지 않은 것-으로 진화할 것이다."(p.211)

이 책의 끝을 오래오래 기억하리라.

​

"그럼에도 오랜 세월 당신이 우리의 관계를 기쁘게 여겼기를 바란다. 나는 분명히 그랬다. 당신이 있어서 나는 즐거웠다. 사실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당신 팔에 잠깐 손을 얹었다가-아니, 당신은 계속 구경하고 있어라-나는 슬쩍 사라지겠다. 아니, 계속 구경하고 있어라."(p.263)

​

작가는 마지막으로 상상했다.

독자와 함께 어딘지 모르는 어느 나라의

어딘지 모르는 어느 소도시의 한 카페 실외석에 앉아있는 이미지.

날씨는 따뜻하고 우리 앞에는 시원한 음료가 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우리 앞의 다양한 삶의 표정을 바라보다,

그가 독자인 나에게 다정한 인사를 하고 떠나간다.

내 팔에 살짝 손을 얹고 계속 앉아 있으라 말하고

뒷모습을 보이며 자리를 떠난다.

​

잘 가요. J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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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국내 유일 명화 103점 수록 완역본) - 명화와 함께 읽는 ㅣ 현대지성 클래식 64
호메로스 지음, 페테르 파울 루벤스 그림,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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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디세이>를 보고 당연히 책 <오디세이아>를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겼는데,

그러려고 보니 호메로스의 이전작품인 <일리아스>를 먼저 읽어야겠다는,

꼭 이럴 때 발현되는 의무감과 완벽주의 덕에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함께 구매했고

(큰 맘 먹고) 순서대로 <일리아스>부터 읽기 시작했다.

​

이 오래된 이야기는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은 번역가(전문가들)들의 손을 거쳐

얼마나 다양한 출판사에서 얼마나 많이 찍어냈을까.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일리아스만 해도 너무 다양해서

서점에서 여러 버전의 일리아스를 놓고

표지와 무게(뜻밖에 중요하다!), 번역(나에게 편안한 번역),

부록과 출판사 등을 이것저것 살펴보다가,

내가 고른 책은 현대지성에서 나온 <일리아스>이다.

책 표지에 적힌 "인류 최초의 블록버스터"라는 말도

기대감을 확 끌어올렸다.

이 책은 내용과 관련된 명화들을 컬러로 수록해놓았는데

상상하기도 어려운 옛날에 만들어진 이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져내려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을까.

그렇게 탄생한 작품들이기 때문에

그림 속에서 인물들을 찾아보고 얼마나 원전에 충실하게 표현되었는지를

감상해 보는 것도 또 다른 독서의 즐거움이었다.

​

살아오는 동안 엄청나게 많이 들어봤고

심지어 읽어보지도 않은 주제에 아는 척도 많이 하는 책 중의 하나가

호메로스의 작품들일 것이다.

실제로 읽어보니, 내가 알았다고 생각했던 건 지극히도 일부였고

그마저도 다 틀렸었구나, 라는 생각으로 겸손해진다.

​

기원전 8세기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일리아스>는

'일리온에 관한 시'라는 뜻이다. 일리온은 트로이를 뜻하는데,

책에서는 트로이와 그리스 양쪽을 언급하는 단어들이 다양하게 사용된다.

​

참고로 정리하면,

  • 고대 그리스군 진영:

    • 아카이오스인, 아르고스인, 아르카디아인,...

    • 대표적 인물로 아트레우스의 아들인 아가멤논(사령관)과 메넬라오스 형제, 오디세우스, 아킬레우스(파트로클로스), 디오메데스, 네스토르, 큰 아이아스, 작은 아이아스,...

    • 그들을 편드는 신들: 헤라, 아테나, 포세이돈, 테티스(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헤파이스토스..

  • 트로이아군 진영:

    • 트로스인, 다르다니아인, 리키아인...

    • 대표적 인물로는 프리아모스의 아들인 헥토르(사령관)와 파리스(알렉산드로스)형제, 아이네이아스, 사르페돈,..

    • 그들을 편드는 신들: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아프로디테, 아레스,...

​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이 일어난지 10년째 되는 해의

첫 50일 간의 사건을 담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앞뒤 맥락을 이해하고 읽으면 훨씬 이해하기 쉬운데,

트로이아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테에 방문했다가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와 사랑에 빠져(이것도 신들의 행위)

트로이아로 도망쳐 온 것이 이 전쟁의 원인이 되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리스는 연합군을 이루어 참전했기 때문에

아킬레우스, 오디세우스 등 각지에 흩어져 있던 영웅들이 트로이아로 향한다.

하지만 트로이아의 저항이 생각보다 거세어 10년 가까이 전쟁이 이어진다.

(이 책에서는 "명화와 함께 읽는 트로이아 전쟁의 배경"을 앞 부분에서 설명해준다.)

​

책 <일리아스>의 시작은 "아킬레우스의 분노"이다.

아킬레우스가 전리품으로 얻은 브리세이스라는 여자를

아가멤논이 데려가려 하면서(그것도 이유가 있긴 하다..)

그리스 군 내부에 불화가 발생하고 아킬레우스가 참전을 거부한다.

억울해하는 아킬레우스의 청을 들어주려고 그의 엄마인 테티스 여신이

제우스에게 간청하면서 인간의 전쟁에 신들이 깊숙이 개입하게 된다.

​

제우스는 아킬레우스가 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돋보일 수 있도록

초반에는 트로스인에게 힘을 실어주려 한다.

"제우스는 빠른 발의 아킬레우스에게 영광을 주려고

트로스인과 헥토르가 승리하기를 바랐지만, 아카이오스인 백성이

일리오스 앞에서 전멸하기를 바라지는 않았고, 단지 테티스와

그녀의 대담한 아들에게 영광을 주고자 할 뿐이었다."(p.411)

​

하지만 그 뜻을 알리 없는 포세이돈은 아르고스인(그리스)이

"트로스인에게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괴로워 제우스에게 격분"했고

인간의 모습으로 진중을 돌아다니며 아르고스인을 독려한다.

​

"이렇게 두 신이 끊을 수도 없고 풀 수도 없는 격렬한 전쟁과 전투의 밧줄을

양 끝에서 잡고 양쪽 진영 위에서 교대로 이쪽으로 끌어당겼다

저쪽으로 끌어당겼다 하는 가운데 많은 전사의 무릎이 풀렸다."(p.411)

이렇게 신들의 편이 나뉘어 다툼이 일어나면서

필멸의 인간들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다.

신들 사이에 이전부터 켜켜이 쌓여 있던 감정적 앙금들도 드러나는데,

특히 제우스와 헤라(부부)의 싸움이 가관이다.

​

아킬레우스가 참전하지 않는 동안 그리스군은 트로스군에 밀리고

아가멤논이 아킬레우스와 화해를 시도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를 보다 못해 아킬레우스의 절친이자 시종인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착용하고 전투에 나섰다가 전사하자

이를 계기로 분노와 복수심에 휩싸인 아킬레우스가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전쟁의 양상이 달라진다.

전쟁 장면은 생각보다 잔인하게 묘사된다.(영화보다 잔인했다고 느낀다.)

신의 아들인 아킬레우스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었고

용감한 헥토르가 그에게 맞서지만, 결국 죽음을 맞는다.

​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이고도 분이 안 풀려서 그를 전차 뒤에 묶고

아침마다 파트로클로스의 시신 주변을 세 바퀴씩 도는 등 무서운 복수심을 표출한다.

신들은 살아있는 동안 그들을 섬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헥토르의 유해가

그런 식으로 모욕 당하는 것을 차마 보기 힘들어서,

아버지 프리아모스가 시신을 가져가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아킬레우스를 설득한다.

그렇게 <일리아스>는 헥토르의 장례식으로 끝이 난다.

​

호메로스는 주인공들의 성격을 직간접적으로 묘사하는데,

어느 하나 완벽하거나 부족하기만 한 인물이 없이 다채롭고 입체적이다.

아가멤논은 호전적이고 욕심이 많은 인물로 헬레네의 입을 빌려

"드넓은 땅을 다스리는 아트레우스이 아들 아가멤논으로,

훌륭한 왕이자 용맹한 장수"(p.116)로 묘사된다.

오디세우스는 "지략가 오디세우스"로 언급되는데

"바위 많은 이타케 땅에서 자랐는데,

온갖 계책과 술수에 능하고 비범한 사람이지요."(p.117) 라고 하며

말이 많지는 않지만 산만하지도 않고 말솜씨가 있는 메넬라오스와 비교해

언변으로 그와 겨룰 자가 없다고 묘사한다.

성격이 불 같은 아킬레우스는 어머니인 테티스 여신을 통해

신들의 도움을 (자주) 받는다.(얼핏, 마마보이..?)

그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존감과 자존심도 어마어마하지만

한편으로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여 죽을 운명임을 겸허하게 인식하고 있기도 하다.

헥토르는 정의롭고 용감한 트로스의 왕자이며

그의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이 가장 아끼는 아들이다.

그는 "언제나 트로스인의 선봉에 서서 용감하게 싸워,

아버지와 나 자신의 위대한 명성을 지켜야 한다고 배워왔기 때문에"(p.224)

겁쟁이처럼 전쟁을 피해 멀리 달아나지 않겠다고 말한다.

​

"훌륭한 물푸레나무 창을 든 프리아모스의 백성이

멸망할 날이 오리라는 것을 나도 생각하고 마음으로 잘 알고 있소.

트로스인이 나중에 겪게 될 고통이나

헤카베와 프리아모스왕의 고통,(그의 부모)

적군에 의해 먼지 속으로 쓰러질 수많은 용감한 형제들의 고통보다

내가 더 걱정하는 것은 당신이 눈물을 흘리며 청동 갑옷 입은

아카이오스인 중 누군가에게 끌려가

자유의 날을 빼앗겼을 때 겪을 고통이라오.

(...)

그러니 당신이 끌려가며 울부짖는 소리를 듣기 전에

차라리 내가 죽어 땅속 흙에 묻혔으면 좋겠소."(p.224-225)

​

헥토르가 잠시 성에 들러 그의 아내와 어린 아들을 만났을 때

그의 솔직한 심정을 담아 아내에게 한 말이다.

3천년 전 고대의 서양 문학에서 인지상정을 느끼는 부분이었다.

그런 이유로 고전은 생생히 살아남아 현대인들에게도 감동을 주는 것이리라.

​

<일리아스>에서 그려지는 트로이 전쟁은

인간의 전쟁이기도 하지만 신들의 이야기도 그에 못지 않게 무성하다.

신들은 분명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지만

희노애락과 질투와 복수, 연민 같은 감정이 인간 못지 않아서

실수도 하고 다투기도 하고 속이기도 하는 등, 매우 인간적이다.

그런 신들이 인간과 사랑에 빠져서 낳은 자식들이 또 가문을 이루기도 해서

영웅들은 누구나 나를 지켜주는 신 하나쯤은 있는 것 같다.

영화 <오디세이>에서도 오디세우스와 아테나 여신이

밀접하게 그려지는데, 이 책에서도 아테나가 오디세우스를 아끼는 장면이 그려진다.

그의 동료들이 오디세우스를

"팔라스 아테나께서 아끼시는 사람"(p.320)으로 묘사하고

오디세우스 역시 아테나에게

"당신은 늘 저의 모든 발걸음을 살피시며, 제가 힘들 때마다

함께하셨습니다."(p.322)라며 기도한다.

​

이들은 모든 순간에 신의 존재를 느끼고,

인간의 마음과 행위를 신의 의도로 설명한다.

즉 내 마음에 질투가 일거나, 용기가 생기거나,

창에 맞아 죽을 수 있었는데 창이 빗겨가거나, ..

전쟁 곳곳의 장면에서 신들이 개입하고

개입의 여부와 정도에 대해 신들끼리 다투기도 한다.

설명할 수 없는 운명, 예를 들어 죽을 때가 되지 않았는데 죽거나,

어딘가에서 누군지 모를 이의 아이가 태어나거나, 어떤 능력이 남보다 출중하거나,

장애를 입게 되거나, 사랑에 빠지거나 배신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인간사의 모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신의 행위라고 해석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였었던가 보다.

제우스는 "대지 위에서 숨 쉬며 다니는 모든 것 중에

인간보다 비참한 존재도 없"(p.550)다고 말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힘을 주기도 하고 뺐기도 하며

인간의 운명을 이리저리 내몰고 저울질한다.

인간은 모든 것을 신의 개입, 즉 운명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고대인들에게 인간의 운명과 신은 그런 관계였다.

줄거리는 요약하면 단순하지만

이 책이 이렇게 두꺼운 이유는

고대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 아나톨리아의 영웅들과

신과 얽힌 인간의 족보를 어마어마하게 풀어놓았기 때문이다.

​

"호메로스는 오랫동안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고대 그리스인의 신화와 전설을 트로이아 전쟁이라는 그릇에 압축해 담아낸다. 우리는 <일리아스>에서 고대인의 문학적인 탁월함, 신과 인간이 어우러진 세계관, 인생의 가치관, 필멸의 인간이 겪는 고통과 비탄을 본다." (p.769, 해설)

​

중년이 넘어서야 독서를 결심한 계기가 된

영화 <트로이>, 그리고 특히 <오디세이>는 정말 재미있게 보았지만,

신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그들이 전쟁에 개입하는 과정을

거의 보여주지 않았거나(트로이) 암시적으로 다루었다(오디세이)는 점에서

호메로스가 들려 준 이야기에 비해서는 반쪽짜리라고 할 수 있다.

영화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영화는

필멸의 인간들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는 것 만으로도 충분했고,

오히려 그렇게 인간사에 집중함으로서 공감의 지점들을 압축적으로 제공했을 것이다.

다만, 주인공들이 내린 어떤 결정이 영화에서는 그들의 판단 결과로 그려진다면,

책 속에서는 그 결정의 배경이 된, 그들의 신들과 조상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스토리와 신들의 의도도 함께 제공된다는 점에서

매우 다층적이고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영화는 촬영기법과 감독의 의도 상 각색이 불가피하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장례를 치르고 추모 경기를 여는데,

전차 경주, 권투, 레슬링, 달리기, 겨루기(무기), 원반던지기,

화살쏘기, 창던지기 같은 종목을 보면 기원전 776년에 시작되었다는

올림픽 종목들이 떠오른다.

인간이 몸으로 하는 권투, 레슬링, 달리기,.. 싸우고 던지는 것들은

전쟁을 위해 꼭 필요한 종목들이면서 때로는 아킬레우스처럼

상품을 걸고 즐기는 스포츠이기도 했다니..

오래된 작품에서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요소들을 발견하면

새삼 인류애가 솟아오르기도 한다.

​

<일리아스>는 두꺼운 분량만큼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그만큼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혹여 책의 두께와, 페이지마다 그득한 각주들에 질려

<일리아스> 읽기를 포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조금만 참고

(각주를 일일이 읽을 필요는 없으며, 뒤로 갈수록 각주는 없어진다.)

인류 최초의 블록버스터 속으로 빠져들어보기 바란다.

3000년 동안 수많은 분야에 영감을 제공했던 호메로스는

주인공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용감하지만 겁이 많고

사랑하지만 미워하고, 단호하지만 흔들리는

현대인들에게도 엄청난 이야기를 들려줄테니.


인류 최초의 블록버스터 <일리아스> : 네이버 블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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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아 (국내 유일 명화 104점 수록 완역본) - 명화와 함께 읽는, 고대 그리스어 완역본 ㅣ 현대지성 클래식 65
호메로스 지음, 페테르 파울 루벤스 외 그림,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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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의 블록버스터" <일리아스>에 이어

"인류 최초의 로드 무비" <오디세이아>를 완독했다.

("인류 최초의~"는 출판사에서 붙여 놓은 수식어임을 밝힌다.)

​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을 배경으로

약간의 시차를 두고서 전쟁과 귀향을 그리는 각각의 이야기로 보기 보다는

사실상 이어지는 두 권을 관통하는 발단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책 뒷 부분의 <해설>이 매우 도움이 된다.)

아킬레우스의 아버지가 될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여신 에리스로부터 시작된 여신들의 다툼이,

메넬라오스의 아내였던 헬레네가 파리스와 함께 트로이아로 도망가게 되는 결과를 낳았고

그렇게 전쟁이 발발하고, 영웅들이 죽고, 전쟁이 끝나

오디세우스가 온갖 역경을 겪어내며 10년 만에 귀향하는 이야기가 된 것이다.

​

<오디세이아>는 주인공이 어떤 이유로 집을 떠나

온갖 모험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긴 여정을 그린 숱한 이야기들의 고전이다.

어릴 적 보던 만화영화들도 떠올려보면 인물과 배경이 다를 뿐

기본적으로는 오디세우스 못지 않은 모험을 그린 것들이 많다.

(꼬마자동차 붕붕, 별나라 손오공, 미래소년 코난,, 진짜 옛날 만화들..)

돌아온 주인공들은 더 이상 옛날의 그가 아니라는 것도.

어린 나는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날 만화가 종영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안도를, 한편으로는 아쉬움을 느꼈었다.

​

큰 그림으로 보면 인생 자체가 오디세우스 못지 않은 모험이다.

내키지 않는 모험의 순간은 도처에 널려 있고

현명하게, 때로는 어리석은 대처(오디세우스 조차도)를 하면서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다. 어딘가에 도착할 나는

오늘 지금의 나와도 다를 것이다.

​

<오디세이아>는 오기기에섬의 칼립소에게 무려 7년이나 억류되어 있는 오디세우스를

신들이 귀향시키기로 결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헥토르의 장례식으로 끝난 <일리아스>부터

<오디세이아>가 시작되기 전의 이야기는 생략되어 있다.

트로이 전쟁 막바지에 아킬레우스가 파리스의 화살에 맞아(발뒤꿈치) 숨을 거두고

그리스 군이 그 유명한 목마를 제작해 성안으로 들여보내는 데 성공한다.

트로이 함락 후 헬레네는 메넬라오스에게 돌아가고

그리스 군대도 뿔뿔히 흩어져 귀향하지만

오디세우스는 포세이돈의 미움을 받아 온갖 고생을 하면서

고향 이타케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

영화 <오디세이>를 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책을 읽어서

나름 생생한 비교가 가능했는데, 영화 자체도 물론 재미있었지만

글에서 묘사된 오디세우스의 모험과 이후 구혼자들을 처단하는 장면들이

꽤나 충실히 화면에 담겼다는 데 다시 한번 감탄했다.

물론 생략된 부분이나 각색된 장면도 있지만,

(예: 키클롭스가 말을 할 줄 안다. -0-,

그리고 개인적으로 영화보다 책이 더 잔인, 끔찍했다.)

시간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다루고 시각적으로 훌륭하게 재현했다는 점은

책보다 영화가 더 뛰어난 부분이다.(감독이 완벽주의자!)

책에서는 사건이 시간 순으로 나열되지 않고

음유시인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나,

오디세우스가 파이악스인들의 나라에서 회상을 하는 형식으로 전개 되기 때문에

책 앞에 실려 있는 지도를 잘 참고해야 하는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

영화에서는 아테나 여신이 오디세우스 내면에 존재하는

죄책감과 양심을 비추고 일깨우는 역할처럼 나오는데,

책에서는 내내 오디세우스(그리고 그의 아들 텔레마코스)를 도와주며

자주 인간의 모습으로 개입한다.

"필로스 아테나께서는 그의 곁에 가까이 머물며 노골적으로 도우셨지.

신들께서 인간을 그렇게 대놓고 아끼며 사랑하시는 걸 나는 지금껏 본 적이 없다네."(p.85)

​

어떤 신에게 미움을 받고, 어떤 신의 도움을 받는지 잘 알고 있는 오디세우는

이런 말을 한다.

​

"대지가 기르고 대지 위를 숨 쉬며 다니는 모든 것 중에 인간보다

더 약한 존재는 없소. 신들께서 모든 일을 잘되게 해주시고

무릎을 잘 움직일 수 있게 해주시는 동안

사람들은 자기가 나중에 재앙을 겪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소.

하지만 축복받은 신들께서 재앙을 안겨주시면,

자기 뜻을 거슬러 찾아온 그 재앙을 어쩔 수 없이 견뎌내야 하오.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마음은, 신들과 인간의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내리시는 운명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오.

나도 한때는 반드시 사람들 가운데서 복을 받고 부자가 될 줄 알았소.

하지만 나는 아버지와 형제들을 믿고 내 힘과 강함에 기대어

못된 짓을 많이 했소. 사람이라면 절대로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을 하면

안 되고, 신들께서 무엇을 주시든 묵묵히 받아들여야 하오."(p.480)

​

신들이 인간의 운명을 살피고 있으며 그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인간으로서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을 하면 안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한편 신의 입장을 들어보자면 제우스는,

​

"아, 한심하게도 필멸의 인간들은 툭하면 신들 탓을 하더이다.

재앙이 신들에게서 비롯되었다 하나, 실상은 그들의 경솔함으로

악을 행하여 운명을 넘어선 고통과 괴로움을 겪는 건데 말이오."(p.31)

​

그러니, 필멸의 인간과 신의 말을 종합하면

신들이 인간의 운명에 개입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인간의 이치에 맞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 아닐까.

오디세우스도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경솔하고 무모한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순간에 대한 책임을 묵묵히 해 나간다.

영화에서 감동적인 대사로 많이 언급되는

"Give up the fight. Give up the control, and live."는

맞서려 하지 말고, 통제하려 하지 말고, 그저 살아가라는 뜻이다.

​

영화를 보고 잠깐 먹먹했었는데,

필멸의 인간으로서 느끼는 허무함, 뭔가를 채우고 싶은데 채울 수 없을 거라는 느낌,

그리고 그게 인간이고, 인간의 삶이 그런 것이니 받아들여야겠다는 체념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체념은 수동적인 포기가 아니라, 내게 주어진 것들 안에서 최선을 다 하는 것.

어쨌든 우리는 도착한다.

우리는 이 여정이 끝나면 어디에 도착하려는 것일까.

도착지는 다 다르겠지만, 그 곳에 이르렀을 때 나는 어떤 인간이 되어 있을까.



인류최초의 로드무비 <오디세이아> : 네이버 블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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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하루치의 낙담
박선영 지음 / 반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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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다 읽고 나서도 책장 위에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한참동안 내 책상 위에 놓여있다.

접어둔 부분이 많아서 필사하는 데도 시간이 걸렸고,

그러고 나서도 자꾸 손이 가고 마음이 가서 다시 펴보게 된다.

내가 공감하고 위로 받은 만큼, 책 속의 공감과 위로가

치열하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에게도 유효하길.

​

이 책을 쓴 작가는 한국일보 기자였다.

힘들지 않은 직장인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기자라는 직업의 내밀한 사정과 그 치열함을 읽고 보니

끝장 낼 듯 덤벼 본 일도 없고 부딪쳐 싸우다 지쳐 울어본 경험도 없는 나는

상대적으로 너무 나약해보인다.

어느 직업이나 그들만의 세계가 있고 직업윤리가 있을 터인데

갈망하던 자리에 어렵게 자리잡고 보면

사명감, 혹은 소명 비스무레한 초심으로 중무장해 온 직업윤리가

손바닥에 쥔 모래처럼 사라져가는 걸 경험하는 순간들이 있다.

나는 절대 안 그럴 것 같았지만 사정상, 도리상, 시간상 등등의

핑계를 대어가며 살짝, 조금, 잠깐 선을 넘게 되는 경험,

그리고 거기서 자괴감을 느끼는가, 혹은 그게 사회생활인 거라고

촉촉히 젖어드는가에 따라 두 갈래 길이 내 앞에서 나눠질 것이다.

그렇게 숱한 갈림길에서 이런 저런 선택들을 하며 나도 지금에 이르렀을 뿐이다.

​

17년간 몸담았던 회사를 그만 둔 작가는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경험하고 느낀 자부심과

그 이면의 부끄러웠던 기억들까지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책 속에서) 지금은 눈뜨자마자 씻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누리면서

기타도 배우고 책도 읽고 글도 많이 쓴다고 했다. (심지어 정말 잘 쓴다.)

나는 그럴 용기가 없으니 아직은 그냥 부러워만 해야겠다.

​

이 책에서 작가는 직업인으로서의 관점뿐만 아니라

엄마로, 시민으로, 여성으로, 글쓰는 사람으로, 자유인으로

다양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너무도 솔직하고 내밀한 이야기들을 지적으로 엮어내고 있었다.

살면서 저지르는 실수들, 열심히 좇아왔던 꿈들, 숱한 실패들, 다시 갖는 희망들,

질 줄 알면서도 덤벼보는 용기, 그러다 처절히 패배한 후 상처를 핧는 법,...

그래서 이 책은 요약할 수 없다.(에세이이기도 하다.)

새점을 보듯, 마음이 어지러울 때 한 번 펴 보고, 그 페이지에 오래 머물게 되는

그런 책이었다.

​

세밀한 시선들.

내가 따로 필사해놓은 부분들 중 일부만 옮겨본다.

​

"세상에나, 제 발로 걸어들어간 곳에서 제대로 일을 해내기까지 그 오랜 시일이 걸리다니. 스스로 그곳에 갔다고 해서 저절로 그것이 되는 것은 아니라니. 그러고 보면 부끄러움이란 이 간악한 인간종에게 얼마나 필수불가결한, 훌륭한 교사란 말인가."(p.51)

​

"대한민국 유자녀 여성에게 일이란 누군가는 반드시 상처받는 삼각게임이다. 스스로 2급 트랙으로 후퇴하며 커리어를 만신창이로 만든 엄마가 상처받거나, 엄마 없이 외롭게 시간을 보내며 돌봄공백에 시달리는 아이가 상처받거나, 언제가 생의 최후일지 모르는 노년의 부모가 양육이라는 감옥에 갇혀 무너져내리거나, 셋 중 하나 혹은 둘이다."(p.73)

​

"출세란 흙 묻은 알사탕과도 같다. 사탕은 먹고 싶은데, 흙을 삼킬 수는 없다. 그래서 아예 안 먹는 길을 택했고, 세상에 맛있는 게 어디 사탕뿐이냐, 쫀디기도 먹고 아폴로도 먹는다. 하지만 자주 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는 이 일을 아직도 사랑하는데, 끝이 뻔하다."(p.75)

​

"실금. (...) 당장 산산조각을 내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없었던 일로 하기엔 너무도 있었던 일이라서, 차곡차곡 내상으로 축적되는 사건들."(p.81)

​

"하우저는 (...) "우리는 우리 생애의 가장 거창하고 충격적인 좌절들로 인해 파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희망과 야심이 시들면서 함께 시들어간다." 고 말한다." (아르놀트 하우저 인용, p. 84)

​

​"인간은 자신의 선택과 분투를 통해서만 고귀해진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겠지만, 안타깝게도, 천부인권으로서의 존엄과 달리 인간의 고귀함은 획득형질이다."(p.200) 

"고통은 우리를 연결해준다. 아니, 고통만이 우리를 연결해준다. (...) 그러나 고통이란 저마다의 불가침 영역이어서 상대의 승인 없이는 함부로 연결을 도모할 수 없다. 불행한 타인을 돕고자 하는 사람들에게서 지독한 자기애만을 보는 일은 얼마나 빈번한가. (...) 그의 존엄을 훼손하지 않으며 마음을 전하려면 예민한 감성과 세련된 지성을 동원해야 한다."(p.216-217)

​

​책 읽는 동안 멈춰 생각하는 지점이 많았다. 

공감가는 부분도 있었고 내 생각을 다듬게 되는 부분도 많았다.

다시 프롤로그로 돌아가면

"유리병에 커다란 돌멩이를 집어넣는다. 하나 더 넣는다. 또 하나 넣는다. 하지만 병을 가득 채우지는 못한다. 틈새의 빈 공간들은 오로지 작은 모래들로만 채울 수 있다. 내 인생엔 그 모래들이 없었다. 커다란 돌멩이들만이 덜그덕거리고 있었다"(p.12) 라는 고백이 나온다.

​

치열하게 살면서 남들이 좆는 성공과 욕망의 기준을 나 역시도 선망해오다

숨이 차 잠깐 쉬는 사이, 그 욕망이 내 것이 맞는지 생각해 볼 나이가 되어 버렸다.

그 속도, 그 욕망은, 나하고 맞지 않다는 걸 못내 인정하면서도

내가 갖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미련만 덕지덕지 남아

열심히 살지 못하는 나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못나서가 아님을,

커다란 돌멩이는 몇 없어도 다양한 크기의 조약돌과 반짝이는 모래를

다채롭게 열심히 채워나가는 중일거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내가 완성할 유리병도 나름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

나를 응원하며 <그저 하루치의 낙담> : 네이버 블로그


"종결감 sense of closure.(...) 종결 없이 끝내버린 생애사의 주요 사건들은 어딘가에 매복해 있다 돌연 우리를 가격한다. (...) 비겁하게 도망친 관계, 제대로 애도하지 않은 상실, 직면하지 않고 회피한 생의 진실은 원한 서린 귀신처럼 어느 모퉁이에서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 P235

"엉겁결에 몸의 반쪽 정도는 제도 바깥으로 탈락된 무직자 신세가 되고 보니 인생이란 결국 좋아하는 사람들과 즐거운 할 때를 보내며 저마다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내는 것, 단지 그뿐인 것 같다." - P85

"니가 올라가봐야 여기까지지, 그런 무력감. 30대 중반이 넘어가면 같은 이력서를 가지고도 출신 계급에 따라 확연히 달라지는, 서로의 삶이 명확한 분기점을 확인할 기회들이 부쩍 많아진다. 그 어리둥절한 무력감의 시기를 건강하게 잘 넘겨보내지 못하면 우리에게 남은 길은 심술과 역정이 덕지덕지 붙은 추한 노인의 얼굴이 되는 것뿐이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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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숲속 도서관의 사서입니다 - 치유의 도서관 ‘루차 리브로’ 사서가 건네는 돌봄과 회복의 이야기
아오키 미아코 지음, 이지수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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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숲 속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면

고즈넉한 일본식 가옥이 나타난다.

나라 현 동쪽 히가시요시노무라라는 산촌,

70년쯤 전에 지어진 낡은 집이

한 달에 열흘 정도만 개관하는 숲 속 도서관이 되었다.

오크라 주임(강아지)와 가보스 관장(고양이)이 함께하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인문계 사설 도서관 루차 리브로이다.

직접 가 본 건 아니고,

책 속 사진들과 글을 바탕으로 상상해 본 풍경이다.

​

이 책의 원제목은 <불완전한 사서>.

이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는 아오키 미아코는

과거에 직장생활로 몸과 마음에 이상이 생겼다.

뜻대로 되지 않는 직장 생활, 답답함과 헛도는 느낌, 공허함..

사회의 움직임 속에서

"노동력 제공자로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된 자신에게서 존재의 가치를 찾지 못했고,"(p.35)

자살시도로 이어져 3개월 동안 입원해야 할만큼

큰 부상을 입게 되었다.

이후에도 자발적으로 폐쇄병동에 입원하는 등

마음의 상처가 크게 남았다.

​

"살기 위해 읽는다"고 말하는 저자는,

"저는 정신질환을 앓으며 사설 도서관을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저 자신도 과제를 껴안은 채로 다른 사람의 과제를 도와주고 있는, 문자 그대로 '불완전한 사서'입니다."(p.17)

라고 고백한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였지만 결국 도서관을 열어

자신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천천히, 조용히 운영하고 있다.

도서관 이용자들이 이 불완전한 사서를 도와

숲 속 도서관의 따뜻하고 깊은 마음이 조금씩 퍼져나간다.

​

그녀는 책은 창문이라고 말한다.

문처럼 손잡이를 돌리면 곧장 다른 세계로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창문이 존재하면 지금의 방과는 다른 세계를 느낄 수 있"(p.23)기 때문이다.

​

"창문은 바깥 세계의 부드러운 바람과 강렬한 햇빛, 비에 젖은 흙냄새, 나무와 꽃이 있는 선명한 풍경을 방으로 불러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책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다채로운 풍경과 바람, 그리고 빛을 데려와주는 근사한 창문입니다."(p.23)

​

"누군가가 건네준 책을 펼치면 등 뒤에서 창문이 열리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제가 눈길을 주지 않았던 장소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녹슨 창문이 반강제적으로 삐걱삐걱 열리며 바람이 들어오고 방 안이 밝아지는 기분입니다."(p.204)

문을 열고 적극적으로 다른 세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아도,

창문을 통해 바깥 공기를 조심스럽게 느껴보고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것,

상처받은 마음이 바깥 세계와 안전한 거리를 두고 풍경을 바라볼 수도 있지만

때로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창밖 풍경을 감상할 수도 있고

내가 미처 열지 못한 창문을 다른 사람이 열어서 보여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래서 이 도서관에서는 장서에 붙여둔 포스트잇을 떼지 않고 대출하고,

오히려 이용자가 도서관의 책장을 채워주는 일도 생긴다.

​

저자는 자신이 읽었던 여러 책들을 소개하며

상처를 치유해 온 생각의 갈피들을 담담히 털어놓는다.

다행히도 상처투성이였던 과거를 돌아보면

어려움과 책이 늘 함께 했다고 말한다.

​

"책장에서 책을 한 권 고르는 것은 신기한 행위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물건을 고르는 경우에는 하나를 집어 들면 나머지는 선택에서 제외되는 셈이지만, 책은 조금 다른 느낌입니다.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고르면 그 책과 관련된 다른 책을 또 읽고 싶어집니다.(...)책이라는 물건 자체가 숙명적으로 횡단성과 연속성을 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p.75)

"저는 출세하지 않아도 좋으니 다른 사람을 억눌러서 자신의 가치를 느끼거나 난폭하게 상대를 시험해보려고 하는 관계로부터 거리를 좀 두고, 제 나름대로 마음속에 그리는 인간이 되고 싶습니다."(p.178)

​

불완전한 사서로 숲 속, 좋아하는 책으로 가득 채운 공간에서

조용히 마음에 맞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회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

도시에서의 빠른 삶의 속도에 맞추지 않아도,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며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되는 시간들이

부러운 한편, 내가 모를 일본 어느 산촌의 루차 리브로를

방문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언어의 장벽으로 깊은 대화를 나누기는 어려울지라도

다친 마음을 책으로 치유하려 한다는 공통점에서는 공감하지 않을까.

​

이 책에서 저자가 다정한 말씨로 소개하는 좋은 책들이 많은데,

우리나라에서 출간되지 않은 책이 많아서 조금은 아쉽다.


살기 위해 읽다, <나는 숲속 도서관의 사서입.. : 네이버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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